“법정스님은 눈-낙엽 즐긴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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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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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배달 소년’ 스님 유언따라 남긴 책 6권 받아… “길상사에 기증할 것”
“만화‘고바우 영감’ 연재 동아일보 등 신문 건네받은 일 빚으로 여기신 듯”

법정 스님의 상좌인 덕진 스님(오른쪽)이 3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2동 길상사 행지실에서 1970년대 초 법정 스님에게 신문을
 전했던 강모 씨(왼쪽)에게 법정 스님이 즐겨 보던 책을 전달하고 있다. 강 씨는 얼굴과 이름이 지면에 나오는 것을 한사코 
고사했다. 뒤쪽은 법정 스님의 맏상좌인 덕조 스님. 박영대 기자
법정 스님의 상좌인 덕진 스님(오른쪽)이 31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2동 길상사 행지실에서 1970년대 초 법정 스님에게 신문을 전했던 강모 씨(왼쪽)에게 법정 스님이 즐겨 보던 책을 전달하고 있다. 강 씨는 얼굴과 이름이 지면에 나오는 것을 한사코 고사했다. 뒤쪽은 법정 스님의 맏상좌인 덕조 스님. 박영대 기자
법정 스님이 유언으로 아끼던 책을 전해주려고 했던 ‘신문 배달 소년’도 무소유를 실천했다. 법정 스님의 상좌 덕진 스님은 31일 오후 길상사 행지실에서 법정 스님이 평소 즐겨 보던 책 6권을 ‘이 소년’에게 전달했다. 그는 40여 년 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종무소에 배달된 신문을 법정 스님에게 전해주는 일로 스님과 인연을 맺은 강모 씨(49)였다.

이날 책을 받은 강 씨는 “나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부담이 커 많이 망설였다”며 “책은 나 개인이 아닌 사부대중의 것이니 길상사가 요청하면 조건 없이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덕진 스님은 “강 씨가 기증하는 책은 길상사에 지어질 예정인 법정 스님 기념관에 전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 “덕진은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주면 고맙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동안 상좌 스님들은 법정 스님이 1970∼1973년 봉은사에 머물 때 종무소에 배달된 신문을 스님의 거처인 다래헌까지 가져왔던 소년을 수소문해왔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강 씨는 공양주 보살인 어머니를 따라 절에서 생활했다.

강 씨가 이날 받은 책은 ‘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선시’(禪詩·석지현 편역), ‘선학(禪學)의 황금시대’(오경태), ‘생텍쥐페리’(르네 젤러), ‘벽암록’(안동림 역주), ‘예언자’(칼릴 지브란)이다.

강 씨는 “스님이 내게 책을 남긴 이유를 고민했는데, 아마도 신문을 건네받은 일을 빚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덕진 스님은 “법정 스님이 평소 ‘사소한 시은(施恩·시주의 은혜)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강 씨는 법정 스님에 대해 “강직하고 고고하며 계율에 엄격하신 분이었다”며 “행전(行纏·바지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는 천)을 차지 않고 공양을 했을 때는 바로 참회하고, 한여름에도 옷소매를 손목 위로 올리는 일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강 씨는 “그러면서도 스님은 눈이나 낙엽이 쌓여도 치우지 못하게 하고 그걸 즐기셨던 로맨티시스트였다”며 “내게 24색 크레용과 도화지를 사주셨을 만큼 따뜻한 분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강 씨는 당시 어떤 신문을 전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여러 개의 신문을 전했는데, 그중 만화 ‘고바우 영감’이 있던 신문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고바우 영감은 당시 동아일보가 연재한 김성환 화백의 시사만화다.

강 씨는 “스님의 높은 뜻에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 봐 걱정”이라며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지면에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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