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4·19혁명과 언론’ 관훈클럽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언론은 4·19혁명 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오른쪽부터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 조용중 전연합통신 사장, 김진국 관훈클럽 총무,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원대연 기자
7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4·19혁명과 언론’ 관훈클럽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한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당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언론과 야당의 끈질긴 항거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국민의 열망이 축적돼 4·19혁명을 점화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 세미나에는 최인진 사진역사연구소장(전 동아일보 사진부장),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도 주제 발표를 했다.
정 교수는 당시 자유당의 언론탄압 속에서도 부패한 정권을 고발하고 성난 민심을 대변해 혁명의 기폭제가 된 신문 기사들을 소개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5월 5일 동아일보는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정견 발표장인 한강 백사장에 유례없이 20만 명이 운집한 청중 사진을 실어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민심을 전했다.
최 소장은 “독자들은 카메라에 포착된 4·19혁명 관련 사진을 기사와 함께 보면서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는 정의감을 불태웠다. 4·19혁명은 기사만 보던 ‘읽는 신문’의 시대에서 현장사진을 함께 보며 현실에 분노하는 ‘보는 신문’의 시대를 열었다”고 말했다. 특히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반발해 선거 무효를 외치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 사진과 이후 시신이 배에 인양된 사진은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최 소장은 “동아일보는 당시 중요 사건의 현장 사진을 가장 많이 실었고 화보 게재도 시도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1957년 5월 25일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야당 집회에 정치깡패가 난입해 조직적 테러를 가한 사진 4장을 27일자 사회면에 싣고, 1960년 2월 12일 야당 후보 선거운동원들이 등록 서류를 탈취당하고 폭행당하는 사진을 13일자 1면에 실으며 부당한 현실을 고발했다. 동아일보는 1960년 3월 1일 민주당 대구 유세부터 4월 20일까지 90여 장의 사진을 집중 보도했다.
조용중 전 사장은 “동아일보의 폭로가 있은 뒤 다른 신문들도 앞 다퉈 거의 날마다 경찰의 부정선거 지령 기사를 보도해 집중포화라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처음엔 부정선거 계획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던 자유당도 이제 사태를 뒤집을 수 없는 분위기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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