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日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 세운 야마다 아키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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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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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살상 연구하던 곳이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기록 - 보존해야”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는 “전쟁의 어두운 면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료관을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오른쪽 위 사진은 세균전에 쓸 바이러스의 확대 사진이나 암호가 들어가 있는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 오른쪽 아래는 자료관에서 200여 m 떨어진 곳에 있는 위폐 제조 공장. 지은 지 70여 년이 된 낡은 목조건물로 메이지대는 최근까지 화학실험실로 사용해 왔으나 붕괴 위험이 있어 폐쇄했다. 가와사키=김창원 특파원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의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야마다 아키라 메이지대 문학부 교수는 “전쟁의 어두운 면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일본군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료관을 설립했다”고 설명했다. 오른쪽 위 사진은 세균전에 쓸 바이러스의 확대 사진이나 암호가 들어가 있는 사진을 현상하는 암실. 오른쪽 아래는 자료관에서 200여 m 떨어진 곳에 있는 위폐 제조 공장. 지은 지 70여 년이 된 낡은 목조건물로 메이지대는 최근까지 화학실험실로 사용해 왔으나 붕괴 위험이 있어 폐쇄했다. 가와사키=김창원 특파원

《9일 가나가와(神奈川) 현 가와사키(川崎) 시의 메이지(明治)대 이쿠타(生田) 캠퍼스. 한창 물오른 벚꽃이 살짝 부는 봄바람에 눈 내리듯 흩날린다. 신입생들의 활기찬 발걸음과 이들을 붙잡는 동아리 선배들의 ‘호객’ 속에 캠퍼스는 젊음이 넘쳐난다. 4월 봄의 정취를 뒤로 한 채 캠퍼스의 서쪽 언덕을 향해 거슬러 올랐다. ‘시간의 태엽을 거꾸로 돌린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까. 즐비한 현대식 고층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콘크리트 1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메이지대 평화교육 노보리토(登戶)연구소 자료관’이라고 적힌 표시판이 건물 앞에 덩그러니 서 있다. 자료관 운영책임자인 야마다 아키라(山田朗) 교수와 함께 70여 년 전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봤다.》
중일전쟁 전황 불리하자 암살용 독극물 개발… 포로에 생체실험도
주민-학생들 20년 넘게 자료수집해 베일에 싸인 연구소 실체 밝혀


―노보리토연구소는 왜 만들어졌나.

“1937년 7월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을 일으킬 때만 해도 일본 수뇌부는 중국을 간단히 제압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의 저항은 대단했다. 전쟁은 장기화됐고 일본군은 이미 확보한 거점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지경에 빠졌다. 이미 24개 사단 68만 명을 투입한 일본군으로서는 더는 전쟁을 확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때 육군 수뇌부가 전황을 뒤집기 위해 창설한 것이 노보리토연구소였다. 적국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비밀전의 교두보였던 셈이다.”

―노보리토연구소가 만든 비밀 병기는….

“요인을 암살하기 위한 독극물에서부터 생물화학전에 대비한 세균 개발 등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다. 노보리토연구소는 전체 4개과로 각 과는 다시 여러 개의 반으로 구성됐다. 1과는 풍선폭탄 및 전파병기, 2과는 생물화학병기, 3과는 지폐위조, 4과는 무기 제작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일본군은 1944년 11월 3일부터 1945년 4월 29일까지 9300발의 풍선폭탄을 미국 본토로 띄워 보내 민간인이 사망하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는 가축 및 식물 전염병을 유발하는 세균을 개발해 풍선폭탄을 통해 실어 보낼 계획도 세웠지만 미국과의 본격적인 생화학전이 두려워 포기했다.”

노보리토연구소가 만든 것은 비단 비밀 병기뿐만이 아니었다. 중국 경제를 교란하기 위해 당시 45억 엔 규모의 중국 위조지폐를 제작했는가 하면 첩보원들이 사용하는 특수 무전기나 도청기 등을 개발했다. 현재 360m²의 자료관에는 당시 위조된 5위안, 10위안짜리 위폐와 우산모형의 폭탄 등 8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731부대처럼 생체실험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독극물을 합성 제조하는 2과에서 독자 개발한 ‘청산니토릴’을 실제 전쟁포로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독물은 무색무취인 데다 독이 몸 안에서 서서히 퍼지기 때문에 요인 암살 등에 주로 쓰였다. 당시 이 독극물을 개발한 연구원들은 이 약품을 중국 난징의 포로수용소로 가져가 30여 명에게 실험하면서 독물이 퍼지는 시간과 상태 등을 기록으로 남겼다.”

실제로 자료관 전시물 가운데는 당시 생체실험에 참가한 한 연구원이 “홍차에 넣어서 포로에게 먹였다. 처음에는 싫었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생체실험이) 취미처럼 돼버렸다”는 증언을 찾아볼 수 있었다.

―노보리토연구소의 규모가 상당하다.

“당시 국력이 달렸던 일본으로서는 정규전이 아닌 비밀 병기와 무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노보리토연구소에 기대가 컸고 지원도 전폭적이었다. 연구소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1943년에는 100여 동의 건물에 1000여 명이 근무하는 일본 내 최대의 연구소였다. 규모만 큰 게 아니라 당시 이곳에는 첨단 화학실험기구와 독극물 합성에 필수적인 저온실험실도 완비돼 있었다. 육군 관할 연구소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육군본부로부터 직접 거액의 예산과 지휘를 받았다.”

노보리토연구소의 당시 규모만 봐도 연구소의 위상이 짐작된다. 당시 연구소는 현재의 이쿠타 캠퍼스보다도 3분의 1가량이 더 컸다. 지금은 가와사키 시 소유로 돼 있지만 과거에는 연구소에서 만든 무기를 제작하는 공장도 연구소 땅이었다.

―이처럼 큰 연구소가 최근에서야 알려진 까닭은….

“전쟁 중 일본 육군은 이 연구소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미국과의 지상전을 각오했을 때도 가장 먼저 이 연구소 시설을 나가노(長野) 현의 지하벙커로 옮겼을 정도다. 하지만 패전 이후에는 미군정이 내린 명령에 따라 노보리토연구소는 철저하게 증거인멸 작업에 들어갔다. 미군정은 당시 연구내용을 미국에 인도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곳에 일한 연구자들을 도쿄전범재판에 회부하지도 않았다. 또 이곳에서 일했던 민간인들에게도 철저한 함구령이 내려졌다. 간간이 부대의 존재를 알리는 책이나 증언이 있었지만 그 전모가 밝혀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연구소의 실체가 밝혀지는 데는 시민들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오랜 시간 베일에 가려졌던 연구소의 실체를 밝혀낸 것은 이 지역 학생과 시민들의 힘이 컸다. 이들은 1980년대 말부터 과거 연구소 요직에 있던 생존자들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듣고 자료를 하나씩 수집해 연구소의 숨겨진 과거를 퍼즐 맞추듯 찾아냈다. 이후 이들은 ‘노보리토연구소 보존을 위한 시민회’를 조직했고 메이지대와 함께 자료관 건립을 추진한 끝에 드디어 결실을 봤다.”

―대학 내에서는 반발도 있었다는데….

“메이지대는 1951년 노보리토연구소 건물과 용지를 취득해 농학부와 이공계의 실험시설로 사용해 왔다. 워낙 건물이 오래돼 새로운 건물을 짓고 싶어 했다.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의 어두운 과거를 왜 대학이 보존해야 하느냐’는 불만도 있었다. 하지만 전쟁, 식민지시대의 모든 것을 후세에 있는 그대로 남겨줘야 한다는 의견을 대학 측이 과감히 받아들였다.”

―개관 초기임에도 방문객이 많은 것 같다.

“7일 개관 이후 매일 200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온다. 비밀 병기 개발 연구소의 실체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 지금까지 일본군 연구시설을 복원한 자료관도 없었다. 공식적인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전쟁의 뒷얘기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직접 둘러보고 ‘국가가 이런 짓까지 했나’ 하며 경악하기도 한다.”

―일본의 보수우익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매우 의미 있는 자료관이다.

“노보리토연구소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과학, 인간의 마음을 상실한 연구가 얼마나 비참하고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똑똑히 보여주는 사례다. 과학이 양심 잃은 악마의 손에 건네지면 인류에 씻을 수 없는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칫 역사 속에 영원히 묻힐 뻔했던 귀중한 자료들이 일부나마 남겨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전쟁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과거의 아픈 기억을 차세대에 남겨줘야 한다.”

―한일 역사 공동연구에서도 보듯 양국 간 역사문제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과제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과거에 무엇이 있었다’라는 사실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평가를 내리기 전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한 후 의논이 시작돼야 하는 것이다. 한일 역사공동연구는 그런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아직까지 서로 알아야 할 것이 많은데 거기까지 못 간 것 같다. 또 참가자들이 국가를 대표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학문적 양심에서라기보다 정치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야마다 교수는 한일 역사공동연구에 대한 말이 나오자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지지부진한 연구 성과에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그는 일본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서도 “일본의 균형감 잃은 역사인식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며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직접 교류하면서 좀 더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는 노력이 필요한데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만남이 계속 이어져야 실마리를 찾고 바뀔 여력도 생기는 법”이라며 “부끄러운 역사도 잊지 말고 기록하고, 보존하는 노력 또한 필요하며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은 이 같은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강조했다.

가와사키=김창원 특파원 changkim@donga.com

? 노보리토연구소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 창설된 구(舊)일본 육군사령부의 비밀병기연구소다. 만주의 731부대와 더불어 갈 데까지 간 일본 군국주의의 광기(狂氣)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이 7일 평화교육을 위한 자료관으로 거듭 태어났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연구한 야마다 아키라 교수는 1995년 이 대학에 부임한 이후 시민단체와 함께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 설립을 위해 힘써 왔다.

▼고주파 살상무기 등 실험… 中경제 혼란주려 위폐 제작도▼

메이지大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


메이지대 이쿠타 캠퍼스의 서남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노보리토연구소 자료관(사진)은 전쟁 당시 독극물을 제조하는 화학연구동으로 쓰였다. 이쿠타 캠퍼스에서 당시 연구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자료관 근처에 당시 위폐 제조 공장으로 쓰였던 목조건물 2동과 고엽제 연구동이 남아 있지만 70년도 넘은 목조건물이어서 대학 측은 조만간 철거할 예정이다.

자료관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각종 비밀무기를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 5개에 진열된 자료는 연구소의 과거 만행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여준다. 제1전시실은 연구소 설립 배경과 함께 당시 일본 육군이 이 연구소에 걸었던 기대가 잘 나타나 있다. 제2전시실은 풍선폭탄이나 전파병기 등 주로 물리학을 이용한 무기 개발을 했던 연구소1과의 활동을 담았다. 전파병기란 고주파를 인간에게 쏴 대량 살해하는 기술이지만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제3전시실은 연구소의 추악한 과거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하이라이트. 화학을 응용한 생물화학무기와 스파이용품 등을 개발한 연구소2과의 활동 내용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2과는 독극물을 합성하기 위해 대만에서 맹독을 가진 뱀을 들여왔는가 하면 요인 암살용 독극물 청산니토릴을 합성해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자행했다. 또 첩보영화에나 나올 만한 독침이 들어가 있는 만년필, 소이탄을 장착한 우산 등도 전시돼 있다.

제4전시실은 1940년대 중국의 경제교란을 목적으로 자행된 지폐 위조 공정을 설명해준다. 당시 이곳에서 45억 엔어치의 위안화 위조지폐를 만들어 이 중 30억 엔어치가 살포됐다. 이와 함께 제5전시실은 패전 직후 미 군정의 지시 아래 연구소의 흔적이 철저히 인멸되는 과정 등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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