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쿼터가 겨우 30여 초 남았다. 전광판의 점수는 0-28. 이기고 싶지만 기대하지는 않는다. 후회 없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야속할 정도로 손에 잡히지 않던 농구공이 날아왔다. 휠체어 바퀴를 힘껏 굴려 손을 뻗어 공을 잡는다. 공을 든 순간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던진다. 골대를 맴돌던 공이 마침내 들어간다. 전광판의 숫자가 2-28로 수정된다. 첫 골이다. 1쿼터가 끝나는 벨이 울린다.
18일 오후 경기 고양시 홀트장애인종합체육관에서 열린 휠체어농구대회 원주 연세드림팀과 고양 홀트팀의 경기. 푸른색 유니폼의 드림팀은 이번 대회 우승 후보 중 하나인 상대팀의 압도적인 플레이에 고전을 거듭했다. 치열한 몸싸움으로 휠체어가 맞부딪친 충격에 선수들이 넘어지는 아찔한 장면도 있었다.
드림팀은 1쿼터가 끝날 무렵 첫 점수를 냈다. 등번호 9번이 던진 2점 슛이 들어갔다. 휴식시간에 벤치로 돌아온 9번은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린다. 이날 오전 대구시청과의 경기에선 13-60으로 졌다. 승패에 상관없이 이번 경기에선 한 점이라도 더 내고 싶다.
등번호 9번 조양현 선수(43·사진)는 이 팀의 가드이자 원주 연세드림 컬링팀의 팀원이다. 운동은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하지만 운동선수로 살아가게 된 계기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건강하던 허리와 두 다리의 신경을 잃고 나서 찾아왔다.
나를 버린 세상, 나도 나를 버리고 싶었던 과거 16년 전까지 그는 두 발로 걸어 다녔다. 초등학생 시절엔 학교 축구부원이었다. 건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현역으로 제대한 뒤 주차 자동화기기를 만드는 회사에 취업했다. 곧 결혼할 여자친구도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1994년 12월 23일 저녁.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그는 추운 겨울바람을 피해 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계단을 올라가 문 앞에 바짝 다가섰다. 누군가가 안에서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는 듯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몸이 떠밀리면서 균형을 잃었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진 그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엔 병실에 누워 있었다. 손과 팔, 얼굴을 제외하고는 가슴부터 하반신까지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병원에선 중추신경이 마비된 척추장애라고 했다. 장애는 예고도 없이 이렇게 그를 찾아 왔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시련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에 입원해 재활치료를 받았다. 농사를 짓던 부모는 논밭도 팽개친 채 그를 간호하는 데 매달렸다. 노부부는 아들이 다시 걷는 것을 보겠다며 매일 밤 차디찬 병실 바닥에 담요 한 장만 깔고 새우잠을 잤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나보다 먼저 가지 말아다오, 어미의 소원이다” 몸은 사고 당시와 다름없이 뻣뻣했다. 더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도 없었다. 그는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을 버리고 싶었다. 사랑하던 사람과도 헤어졌다. 밖에 나가기 싫었다. 장애인이 된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동정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사람이 그리워지면 탁자 위 창문가로 올라가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밥을 먹는 것도 고통이었다. 집이 좁아서 가족들이 일을 나가고 혼자 남았을 때엔 온몸을 버둥거리며 식당까지 기어가야 했다. 움직일 수가 없으니 소화도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6년 동안 방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끝나지 않을 악몽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유일한 탈출구였다. 술병이 널브러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하루 종일 누워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됐다.
오랜 은둔생활은 욕창이라는 무서운 질병을 가져왔다. 2000년 증세가 악화돼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 이르자 가족들은 싫다는 그를 병원에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다. ‘이렇게 사느니 죽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병원에 함께 간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그를 바꿔놓았다. “나보다 먼저 가지는 말아다오. 그게 내 유일한 소원이다.”
이때부터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의 마음을 더는 아프게 해선 안 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치료를 받던 원주기독병원 측의 소개로 휠체어 농구팀에 들어갔다.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을 만나 운동을 하면서 어두웠던 성격은 다시 밝아졌다. 술도 끊었다. 움직임이 많아지자 소화기능이 향상되면서 몸 상태도 나아졌다. 목이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뻣뻣했던 몸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버렸던 세상을 되찾게 해준 것은 운동이었다.
휠체어농구의 매력에 푹 빠졌던 그는 2003년 5월 컬링이라는 종목을 처음으로 접했다. 냉철한 집중력과 섬세한 기술이 요구되는 컬링은 농구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를 포함해 김학성(42) 강미숙(42) 김명진(39), 박길우 씨(43) 등 이때를 전후해 모인 동료들이 원주 연세드림 컬링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난달 21일 밴쿠버 겨울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컬링 종목에 출전해 한국에 첫 은메달을 안겼다.
막상 장애인이 마음 편히 운동을 하기엔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연습하러 갈 때마다 차량이 필요했고 기름값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가족과 후원자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혼자서는 무엇 하나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국내외 대회에서 성과를 내자 컬링팀은 패럴림픽 메달을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장애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코치를 초빙하는 비용도 큰 부담이 됐다. 조 선수는 컬링에 들어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컴퓨터 관련 업무 등 앉아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으로 이룬 ‘밴쿠버의 기적’ 그를 포함해 팀원 모두가 갖은 고생을 감수한 끝에 딴 은메달이었다. 비장애인 겨울올림픽과 패럴림픽 구기종목에서 한국이 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다. 결승전에서 컬링 강국인 캐나다 팀에 7-8로 석패했지만 제대로 된 컬링 훈련시설도 없이 수영장에서 물을 얼려 연습하며 이뤄낸 값진 승리였다. 체력을 단련할 전문시설도 부족해 휠체어를 밀고 경사진 언덕길을 오르며 팔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던 그들이다. 사람들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냈다”고 놀라워했다.
가슴부터 하반신까지가 마비된 조 선수는 다른 컬링선수를 비롯해 이번 패럴림픽에 참가한 국내외 선수 중에서도 장애가 매우 심한 편이다. 언론은 “어떤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기적”이라고 보도했다. 시상대에 올라 은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 조 선수는 기쁨과 감동보다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며 도와준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기적이었다.
조 선수는 13일 28년 만에 모교인 경기 이천시 장호원초등학교를 찾았다. 은메달리스트인 선배를 만나려고 강당에 모인 600여 명의 후배를 마주하고 그는 환하게 웃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공부하는 교실에서 공부했고 여러분이 뛰어노는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선배 조양현입니다. 저는 비록 장애로 두 손만 겨우 쓸 수 있지만 어려움을 이겨내고 패럴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저와 달리 여러분은 건강합니다. 그것 자체가 큰 행복입니다. 튼튼한 몸으로 저보다 훨씬 더 큰 꿈을 품으세요. 그리고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열심히 헤쳐 나가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이뤄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조 선수는 후배들의 목에 일일이 자신의 은메달을 걸어주며 격려했다. 몸이 불편하지만 아이들이 내미는 종이에 정성껏 사인도 해줬다. 강당을 나선 그는 운동장을 지나다 잠시 후배들이 뛰어노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한때 이 학교 축구부 선수였다. 축구공을 차면서 운동장을 누비던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경기지역 초등학교 대항전에 출전해 2위의 성적을 거둔 적도 있다. 어른이 되면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장애인 컬링팀 20개… 장애인 전용경기장은 ‘0’ 은메달을 목에 걸고 귀국한 뒤 한동안 휠체어 컬링 국가대표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각종 행사와 방송에서 초청이 이어졌다. 하지만 열렬한 환호의 분위기는 다음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따겠다는 이들의 새로운 목표 달성에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메달을 딴 순간 조 선수는 기대했다. ‘이제 장애인 컬링시설이 마련될 수 있겠구나’고. 나아가 더 많은 장애인이 컬링을 배우고 후배 선수도 길러낼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지원도 늘어날 거라고.
전국적으로 장애인 컬링팀은 20여 개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마음껏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에 두 곳뿐인 전용 컬링경기장은 비장애인선수에게 우선적으로 대여돼 장애인은 구경하기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다. 장애인스포츠는 선수의 강한 의지, 이들을 전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코치,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체육시설의 3박자가 갖춰져야 발전할 수 있다.
패럴림픽 연금 月45만원… 생계 잇기도 어려워 하지만 대회가 끝난 뒤, 모든 것은 은메달을 따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조 선수를 비롯한 대표팀은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당분간 대표팀이 모여 연습할 계획은 없다. 마땅한 훈련장소가 없거니와 패럴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지급되는 월 45만 원의 연금으로는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들다. 조 선수 역시 어머니의 뒷바라지와 형제들의 경제적 지원이 없다면 18일 휠체어 농구대회에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비장애인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다음 목표를 위해 벌써부터 훈련에만 집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많은 사람이 환호하고 놀라워하며 감동을 받은 휠체어 컬링팀의 기적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해졌다. 전문가에 따르면 시설이나 지원 부족, 경제적 이유로 국내 장애인 가운데 체육활동을 할 만한 여건이 되는 사람은 7%에 불과하다. 조 선수처럼 운동을 통해 육체적 제약과 정신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누군가가 아직도 집안에 틀어박혀 세상을 버린 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대표팀 다시 모일 때까지 희망을 노래하리 4쿼터를 마치는 벨이 울린다. 전광판엔 최종 점수가 뜬다. 67-14. 원주 드림팀 선수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오전 경기에 비해 점수차는 더 컸지만 득점은 그래도 1점이 늘었다.
이날 밴쿠버에서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컬링 큐 대신 농구공을 잡았던 조 선수. 컬링을 다시 할 때까지 휠체어농구 연습에 더 힘을 쏟아 다음 대회에선 점수를 올리겠다고 다짐하면서 가방을 쌌다. ‘코트에서 넘어지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다’며.
남원상 기자 surrea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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