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車납품… 경비원 연봉도 7000만원대
‘신의 직장’ 만든 노조, 생산성은 10년 제자리
佛본사의 청산절차 추진 막아내며 직원 설득
조합원 스스로 강성노조 몰아내고 일터 돌아와
천년 고도(古都) 경주시내에 들어서니 어스름 저녁이 되었다. 이 고풍스러운 도시 한가운데 이런 공단이 있었나 느끼게 하는 황성동 용강공단. 모두들 주말 연휴를 맞아 들떠 있어야 할 금요일(28일) 저녁이건만 발레오 경주공장에 들어서니 긴장감이 엄습했다.
“사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신분증은 물론 확인 전화까지 거치고서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무려 98일이나 직장이 폐쇄되고 이달 25일 다시 조업이 정상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진은 남아 있는 듯 보였다.
강기봉 사장(51)의 얼굴에도 피곤과 안도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석 달 동안 회사에서 야전침대를 펴 놓고 숙식을 하느라 회사 밖을 떠나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서른여섯 살부터 자동차 부품 중소제조업체 전문경영인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해온 그는 지난해 3월 이 회사 전문 경영인으로 영입되면서 새로운 인생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출근 첫날 노조위원장과 인사를 하는데 첫 일성이 ‘(사장) 출근 저지투쟁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는 것이었다.” 회사 노조가 소속되어 있는 경주지부 금속노조위원장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언제까지 다니는지 보겠습니다.”
노조 때문에 속을 좀 썩겠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회사는 ‘노조 천국’이었다. 현장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생산현황판조차 없었다. ‘노동탄압’이라며 맞서온 노조 때문이었다. 직원 재교육조차 노조가 반대해 한 번도 이뤄지지 못했다. 라인에 문제가 생기면 직원들은 현장반장이 아닌 노조로 달려갔다. 이러다 보니 10년간 생산성은 제자리였다. 처우는 상상을 초월했다.
직원은 모두 정규직이었다. 사무직 평균연봉은 7000만 원, 생산직은 7700만 원이었으며 경비원 청소원 식당아줌마 운전사 연봉이 7200만∼7600만 원이었다. 사원아파트·기숙사까지 무상제공이었다. 여기에 중고교 자녀 전액 학자금 지원을 비롯해 생일과 결혼기념일 등에 선물비로 1인당 연간 28만5000원, 차량 휘발유 일부 지원, 명절 귀성 버스 운행, 휴가비(100만 원) 김장보너스(20만 원) 등이 지급되고 있었다. 직원 근무가 어려울 때는 배우자를 대체 채용해야 한다는 ‘배우자 대체 채용’ 규정까지 있었다. 정년은 만 60세 되는 해 12월 31일까지였다.
경주 일대는 물론 관련업계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보니 결원이 생기면 입사경쟁이 치열했다. 그런데도 창사 이후 23년간 파업을 거른 해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강 사장은 “울산의 강성노조가 패퇴(?)해 자리 잡은 경주 일대 공단 노조 자체가 금속노조 중에서도 워낙 센 곳이라는 지역적 특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1차적 원인은 경영진의 관리 실패였다”고 말했다.
“프랑스 본사에서 나온 파견 사장은 말도 안 통하고 근본적으로 소통이 안 됐다. 2, 3년만 별 탈 없이 버티고 돌아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노조의 불합리한 요구를 다 들어줘 가며 전적으로 끌려 다녔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치고 강 사장이 부임했던 지난해 이 회사 적자는 무려 180억 원. 처음엔 50여 명을 구조조정하며 회사를 살리라던 본사도 결국 지난해 말 발레오 천안공장과 함께 경주공장 청산을 결정했다. 청산비용 917억 원까지 결제를 끝낸 상태였으나 강 사장은 잠이 오질 않았다.
“공장 문을 닫으면 나앉게 될 직원과 가족들 얼굴이 어른거리고 협력업체 직원들, 주변 상인들까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맡았던 회사를 어떻게 내 손으로 문을 닫나 오기도 발동했다. 본사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가며 청산절차를 미루고 어떻게든 직원들을 설득해 회사를 살려보자고 결심했다.”
그런데 노사충돌이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용역사원으로 대체하려는 회사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경비직원들이 고용이 안정된 생산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 2월 4일 발령을 냈는데 노조가 ‘사측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전격적으로 파업 찬반투표에 들어가 찬성 91%를 얻어낸 것. 노조는 10일 냉각 기간과 노동부 중재를 거쳐야 한다는 규정까지 어기고 불법 파업에 돌입했다. 그날 이후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합원들은 생산량을 일부러 줄이는 태업은 물론 밤에 몰래 라인배선까지 끊었다. 교대근무로 공장을 돌려야 할 설 연휴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납품물량을 못 맞추는 상황까지 우려됐다. 강 사장은 관리직 전원(250명)을 투입해 공장을 돌리고 노조를 설득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보다 못한 강 사장은 결국 직장폐쇄라는 초강수를 던졌다.
“매일 회사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문을 부수고 돌을 던지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물류를 막는 노조 때문에 결국 공권력까지 투입됐다. 금속노조 경주지부가 주축이 되어 회사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비롯해 나를 모형으로 만들어 화형식까지 했다. 이어 간부진 삭발, 경주역 앞 대규모(3000명) 집회를 조직적으로 벌였다. 강기갑 의원까지 가세했다.”
강 사장 휴대전화는 비난과 욕설 전화가 폭주해 불통이 되었다. 조합원들은 회사에 복귀한 일부 직원의 집 앞까지 찾아가 피켓 시위를 벌여 노노 갈등은 극에 달했다.
“고객회사인 도요타가 회사를 방문하던 날 일본어로 ‘이 회사 제품 사지 마라’고 플래카드를 내건 조합원들을 보면서 어떻게 자기 회사를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수 있을까 환멸까지 느꼈다. 자식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 하루 효자가 된다고 하던데 정말 회사가 망하는 그날이 와야 회사 중요한 줄 깨칠 것인지 안타까운 날들이었다.”
강 사장도 굽히지 않았다. 노조의 선전전(?)에 맞춰 ‘노조천국’ 실태를 외부에 알리고 직원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설득작업을 폈다. ‘회사는 직원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문자메시지도 수시로 보내고 봉사활동 바자회 카페 등 각종 행사도 주말마다 열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라는 마음으로 미복귀 조합원들을 상대로 가계자금(200만 원)을 무이자로 대출하는 프로그램까지 마련했다. 목석같던 노조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5월로 접어들면서부터.
“600명이 돌리던 라인을 협력회사 직원들까지 동원해 470명이 돌렸는데도 4월에 최고 매출을 낸 것이다. 그동안 자기들 없으면 공장이 멈출 것이라 생각했던 직원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역시 노조 문제로 갈등을 빚어온 발레오 천안공장이 결국 땅 매각 공고를 내면서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도 조합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강성노조 집행부 사퇴를 건의하는 조합원들 모임이 따로 만들어졌고 마침내 5월 19일 553명의 조합원이 모여 95% 찬성으로 민주노총 탈퇴를 결정하면서 새 노조위원장을 선출했다.
나흘 뒤엔 전 직원 600여 명이 주말을 반납하고 ‘회사 살리기’ 워크숍까지 했다. ‘그날’의 감동이 아직 식지 않았는지 강 사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여금(750%)을 반납하겠다, 임금을 자진삭감하겠다, 단체협약 복지부문은 모두 경영진에 일임하겠다는 목소리가 줄을 이었다. 그렇게 강성이었던 노조집행부원들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할 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 사장은 결국 직장폐쇄를 철회했고 떠났던 조합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지옥이었던 회사가 천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소식을 들은 프랑스 본사도 청산 결정을 백지화했다.
“불과 100일 사이에 금속노조를 탈퇴한 노조는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전하는 강 사장은 “이번 사태를 겪으며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 사회 내 산별노조의 변질이었다”고 꼬집었다. 단위 사업장마다 상황이 제각각인데 금속노조가 ‘연대’라는 이름으로 개입하면서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우리 회사 대문을 흔들고 사장 물러나라고 하는데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상대하는 조합원들은 우리 회사 직원들이 아니라 15만 명 전체 금속노조원이었다.”
“생산성도 올려야 하고 기술도 따라잡아야 하는데 노사 갈등까지 해결해야 하는 한국 사회의 제조업 사장들은 성직(聖職)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그에게 “이번 일을 겪으며 노사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경영자가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직원들 앞에 당당할 수 있다.”
그는 “최악의 노사관계가 상생으로 바뀌는 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우리 최대 고객회사인 현대차 노조가 직장 안정을 내걸고 합리적인 분위기로 바뀐 것이나 백수가 넘쳐나는 사회에 정규직 이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시민 여론도 강성노조를 바꾸는 데 큰 힘이 되었다”면서 “이제 한국의 노사 문화도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했다.
“발레오 경주공장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강한 책임감이 묻어나왔다. 죽음에서 삶을 얻긴 했으나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긴 위해선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이제 그의 짐을 많은 사람들이 나눠 져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발레오 경주공장
정식 이름은 ‘발레오전장시스템스코리아㈜’다. 전장이란 각종 전자 장비를 생산한다는 뜻이다. 주요 생산품은 자동차용 시동 모터와 발전기로 물량의 70%를 현대·기아자동차에 납품하고 있다. 1986년 만도기계 경주사업본부로 출발했으나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경영난에 처해 지분 100%를 1615억 원에 프랑스 자동차 부품 그룹인 발레오에 팔았다. 발레오 그룹은 신규 투자와 노후설비 교체 등을 위해 1453억 원을 추가로 투자해 공장을 정상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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