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을 신혼가장 5명 한꺼번에 6·25참전했다 생환
3명 부상 후유증 겪다 사망… 맏형격 송인석 씨 수훈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말 전남 고흥군 동강면 한천리. 60여 가구가 살던 마을이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마을 청년인 송인석(당시 26세·사진), 이화수(당시 25세), 신재우(당시 24세), 신상호(당시 24세), 김규수 씨(당시 22세) 등 5명이 한꺼번에 입대영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 5명은 신혼살림을 꾸린 가장들이었다.
이들은 제주도 훈련소에 함께 입소하면서 “서로 챙겨주며 끝까지 운명을 같이하자”고 다짐했다. 이들은 훈련이 끝난 뒤 육군 3사단 23연대 2대대에 함께 배치됐다.
송 씨 등은 제주도∼부산∼강원 속초를 거쳐 1951년 강원 양구군 가칠봉 전투(9월 4일∼10월 14일)에 투입됐다. 한천리 출신 병사 5명 가운데 맏형 역할을 한 송 씨는 전투에서도 용맹했다. 수색 중대원으로 가칠봉 공격 작전 선두에 서서 고지에 태극기를 꽂았다. 이 공로로 송 씨에게는 1954년 훈장 수여가 결정됐지만 송 씨 본인은 이 사실을 몰랐다. 전쟁 직후 상황에서 행정 집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송 씨는 “당시 전투에서는 적군의 포탄이 쉴 새 없이 쏟아져 포탄조끼(방탄복)를 입고 참호 속에 엎드려 있어도 상처를 입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포탄 파편에 오른손을 다쳐 지금도 손이 떨리는 후유증을 앓고 있다”고 덧붙였다. 순간 노병인 송 씨의 눈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송 씨와 함께 입대해 부상을 당한 고향 후배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송 씨와 함께 전투에 참여한 고향 후배 신상호 씨나 신재우 씨, 김규수 씨는 부상을 입고 제대한 뒤 최근 숨을 거뒀다. 송 씨와 함께 수색중대원 활동을 한 이화수 씨는 1956년 6월 제대한 뒤 한천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광주지방보훈청은 “17일 정부 광주지방합동청사에서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송 씨 등 참전용사 77명과 그 가족들에게 화랑무공훈장 82개를 수여한다”고 4일 밝혔다. 송 씨는 “가칠봉 전투에서 세운 공으로 1954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며 “59년 만에 받은 훈장을 안방에 높게 걸어놓을 생각”이라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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