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길 막혀 아버지가 청평호서 여동생들 껴안고 투신
호국용사들에 대한 보상은 물론 후손들도 존경받아야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그 중심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6·25전쟁’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올해는 6·25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인 데다 천안함 폭침사건의 여파로 이 전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실감케 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치고 6·25와 관련된 고통스러운 기억이 없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68)도 그중 한 사람이다. 10년간 전업주부로 지내다 대학원에 입학해 조선 후기 사상사와 지성사를 전공한 그는 서울대 최초로 여성 국사학과 교수로 임명돼 규장각관장 등을 지냈으며 2008년 3월 최초의 여성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다. 늘 밝고 명랑한 데다 아직도 소녀 같은 풋풋함을 간직한 정 위원장의 이면에 6·25로 인한 참담한 개인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1942년 강원 춘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정 위원장은 네 딸의 장녀로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6·25전쟁은 그 기억을 참혹한 악몽으로 바꾸어 놓았다. 피란길에 나선 아버지가 어린 여동생 셋을 안고 청평호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이다. 이어진 혹독한 공습과 빨치산의 총탄 세례를 뚫고 살아난 그는 그 뒤 “실제 전쟁을 목격했기 때문에 어떤 전쟁영화를 봐도 실감하지도, 감동하지도 못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돌이키기 힘든 개인사를 다시 돌이키게 해 죄송합니다만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말해주십시오.
“남들보다 늦게 피란길에 나섰습니다. 일행은 저희 가족과 친척, 아버지가 하시던 업체 종업원 가족 등 20명가량 됐던 것 같아요. 서울을 거쳐 외가인 충남 서산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미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배를 전세 내 청평호를 거슬러 오르던 도중 갑자기 아버지께서 동생 셋을 껴안고 강으로 뛰어드셨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 구두 밑에서 명함에 쓴 유서를 발견했습니다. 보름쯤 지나 시신이 모두 발견됐고 일단 가매장했다가 전쟁 후 화장해 청평호에 뿌렸습니다.”
―아버지는 왜 그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사업을 하셨으니까 공산당한테 붙잡히면 반동분자로 몰려 죽게 될 몸이니 내 목숨 내가 거두고 자식들도 데려가겠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나를 데려가지 않으신 것은 조금 철이 들었고 주위에서 똑똑하고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 ‘너라도 살아남아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어머니도 잘 모셔라’ 하는 메시지가 아니었는가 싶어요.”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세 동생의 동반자살이라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셨는데 어떻게 그 상처를 극복하실 수 있었습니까.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물론이고 선생님 친척 이웃 등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자존의식이 강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꽤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이 모진 풍파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또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먼저 간 사람들의 몫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아요. 청소년기에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찾았지요.”
―역사학자로서 6·25전쟁을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한마디로 ‘좌우 이념대립의 대리전(代理戰)’이죠. 동서 냉전체제라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구축되던 시대에 불행하게도 분단 상황이던 우리에게 그 시련이 닥친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이 전쟁까지 벌일 이유가 뭐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역사상 미증유의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고 그 후유증이 아직도 우리 사회를 옥죄고 있습니다. 정말 ‘나쁜 전쟁’이죠.”
―일각에서 ‘북침설’이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얘기죠. 6·25를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그런 얘기에 동조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닙니다. 공산권에서도 자료가 나와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이념을 떠나 이 점만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6·25전쟁이 우리 역사에 준 교훈으로 무엇을 들 수 있습니까.
“‘전쟁은 미친 짓’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가져옵니다. 화해와 용서만이 6·25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전쟁을 잣대로 역사를 보는 식민주의사관이나 부국강병을 최고 논리로 내세우는 제국주의사관을 저는 단호히 배격합니다. 그 대신 평화사관과 문화사관을 주창합니다.”
―오늘의 젊은 세대에게 6·25는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 전쟁은 ‘휴전’ 상태지 ‘종전(終戰)’ 된 것이 아닙니다. 천안함 폭침사건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는 호국용사와 순국선열의 피와 땀으로 이룩된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당연히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해드려야 하고 그 후손들까지 존경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현 상태에서 6·25가 남긴 가장 참담한 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산가족 상봉 문제죠. 이 무슨 어리석은 일입니까. 남북의 위정자들이나 통일운동가들도 다른 어떤 문제에 앞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정 위원장의 개인사에서 출발한 6·25전쟁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화제를 ‘역사 기록’의 문제로 옮아갔다. 그의 얼굴이 비로소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2007년 8월 서울대를 정년퇴임한 그는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가 평소 읽고 싶던 책을 마음껏 읽으며 틈틈이 자신의 개인사를 정리해 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국사편찬위원장으로 취임하는 바람에 이 작업을 뒤로 미뤘다.
―과거 우리는 조선왕조실록 등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기록유산을 갖고 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노력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특히 현대사의 경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기구를 만들어 사료의 수집과 정리가 일관돼 있지 못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국가기록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서 나름의 기준을 세워 자료를 수집 및 정리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에서 생산된 기록은 모두 국가기록원으로 가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누가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기록하고 있습니까. 정사(正史)로서의 현대사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명확한 제도와 기준이 없습니다. 생존인물을 평가하기 어렵다는 시간성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 조선시대 실록처럼 국가에서 역사편찬을 주도하는 시대도 아닙니다. 현대사의 기점을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에 대한 합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가 유난히 굴곡이 많았던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국편은 사료(史料)를 조사 수집 정리 연구 편찬하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부임한 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년부터 ‘실록 대한민국사’ 편찬에 들어갔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반대도 있었지만 일단 축적된 사료를 토대로 1945년 8월 15일 이후 우리의 현대사를 ‘실록 대한민국사’라는 이름으로 서술형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년 한 해씩 정리해 나가고 싶은데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아직 1946년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통계 자료집 두 권을 냈습니다. 또 몇 해 전부터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시작해 국내외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어 보람을 느낍니다. 1년에 두 번에서 올해는 세 번으로 늘렸습니다. 내년부터는 행정고시와 외무고시 등 고시에도 반영됩니다.”
―역사 대중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예. 현재 ‘조선왕조실록’의 원문과 번역본을 무료로 인터넷에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고려사’ 번역본도 곧 서비스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한자에 문맹이 되어 버린 젊은 세대에게 번역본을, 그것도 무료로 서비스하는 것은 우리 문화발전에 커다란 폭발력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소설 역사드라마 역사영화 등의 콘텐츠로 크게 기여할 뿐만 아니라 질적 수준을 높일 것입니다. 또 국민들이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평생교육 사회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개인사’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파묻힐 수밖에 없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의 생생한 체험이야말로 역사를 서술하는 데 간과할 수 없는 귀중한 사료입니다. 국편에서도 이를 감안해 몇 년 전부터 여러 분야 주요 인사들의 ‘구술사(口述史)’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역사 기술이 사관(史官)의 이념이나 성향에 좌지우지된다는 점에 종종 두려움을 느낍니다.
“극우나 극좌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6·25전쟁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입니다. 특히 일부 사학자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비판’을 넘어 ‘부정’하려 드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1970년대 이후 우리 현대사를 공부한 분들 가운데 이념적으로 치우친 분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 지금은 차츰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개인사를 학문과 생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키며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온 정 위원장의 모습에서 60년 전 6월 ‘살아남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여덟 살 소녀의 모습이 겹쳤다.
오명철 기자 oscar@donga.com▼“대학진학이든 취직이든 본인들 뜻대로 하게했죠”▼
정위원장의 소신 자녀교육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은 자녀들을 방목해 키운 것으로 유명하다. 2남 1녀를 두었으나 한번도 자녀들의 학교에 봉투 들고 찾아가거나 불법 과외를 시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내 공부 하느라고 시간이 없었으며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교수의 자녀는 당연히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셋 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정 위원장은 “이 또한 아이들이 선택할 문제”라며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세 자녀 중 장남(42)만 ‘정상적’으로 교육과정을 마쳤다. 연세대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한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다산학술문화재단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차남(41)은 10년간 방황을 많이 했다고 한다. 대입 검정시험을 거쳐 모 대학 토목공학과를 지망했으나 낙방했고 ‘전문대 가라’는 엄마의 충고를 뒤로한 채 한때 지방에서 레미콘 기사로 일한 적도 있다고 한다. 옛 충남산업대(현재 청운대)에서 공사를 하던 중 느닷없이 “이제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대학에 입학해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서울대 공대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정 위원장은 “예민한 시기에 아버지의 부도로 맘고생이 심했을 것”이라면서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나와 대학원 동창”이라고 말했다. 현재 대전에 있는 환경시설관리공단에서 일하고 있다.
막내 딸(35)은 고교 졸업 후 10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뒤늦게 전문대를 거쳐 방송통신대를 졸업했고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립극장에서 공연기획을 하고 있다.
정 위원장은 “‘자기 자식 교육이나 제대로 시키지’ 하며 흉보는 소리도 들렸지만 우리 아이들이 특별히 어디가 처진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가정교육은 인성교육이고 지식교육은 학교에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엄마의 힘으로 밀어 붙이면 자생력이 생기기 어렵다는 소신을 지켰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다 대학을 졸업했고 제 힘으로 밥벌이도 하는 것을 보면 억척 부모나 나나 별 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