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3시 30분 소백산 천문대 인근 등산로. 헤드랜턴의 한 줄기 빛에 의지해 산을 오르던 최경환 씨(33)가 중얼거렸다. 구름 때문에 별빛도 없이 컴컴한 등산로는 비가 내려 질척거리기까지 했다.
최 씨는 이날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와 신용회복위원회 임직원이 함께한 무박 2일 야간등산에 참여했다. 채무조정을 받아 빚을 갚고 있거나 최근 채무조정을 끝낸 21명이 재기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22km 산행에 나섰다.
오전 2시에 출발해 제2연화봉까지 약 1시간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순탄한 길이었다. 최 씨는 이벤트 회사를 차린 뒤 2002년 월드컵 특수를 누리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는 “행사를 열기만 하면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재미있어서 계속 사업을 확장했다”고 말했다.
평탄한 길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오기 시작했고 금세 빗줄기가 굵어졌다.
최 씨가 몰락한 것도 순식간이었다. 2003년 거래처가 부도를 내면서 직원 급여를 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신용카드 현금서비스와 신용대출을 받다 보니 4000만 원의 빚을 져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 최 씨는 “정수기 영업을 시작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독촉전화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결국 최 씨는 2004년 신복위에 채무조정을 신청했다. 신복위는 이자를 탕감하고 원금 3496만 원을 5년 반 동안 나눠 갚도록 했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오전 5시에 도서관에 가 담당 분야를 공부했고 밤늦도록 고객을 만났다. 지난해 5월 예정보다 1년 6개월 빨리 빚을 다 갚았다. 그는 “채무조정 기간에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차마 신용불량자라는 말을 못했다”며 “빚 상환을 끝낼 무렵 말했더니 집사람이 ‘왜 말 안 했어. 말했어도 당신과 결혼했을 텐데’라고 해 같이 울었다”고 말했다.
일행은 산에 오른 지 7시간 만에 비로봉(1439m)에 도착했다. 구름 때문에 해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직 지지 않은 철쭉이 이들을 맞았다. 참가자들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최 씨는 “빚을 갚는 것도, 등산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노력해 두 딸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될 것”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정상을 밟은 뒤 졸음과 싸우며 내려온 일행은 인근 식당에서 조촐한 뒤풀이를 열고 각자의 사연을 나눴다. 참가자들은 자녀가 힘들어할 때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다고 입을 모았다. 김기열 씨(43)는 “빚에 쫓기던 시절 아들이 ‘아빠가 감옥에 가야 한다는 전화가 매일 온다. 전화 좀 안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찢어졌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그때를 생각하며 빚을 갚다 보니 채무조정을 받은 후 5년 넘게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다”며 “등산을 계기로 마음을 다잡아 상환기간을 앞당길 것”이라고 말했다.
홍성표 신복위 위원장은 “이들이 파산을 신청하는 대신 책임지고 빚을 갚는 쪽을 선택한 만큼 취업 알선, 소액대출 지원을 통해 하루빨리 신용을 회복할 수 있게 돕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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