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노인은 꼭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59년 만의 상봉. 19세와 25세 청년의 맑던 얼굴엔 이미 깊은 주름이 내려앉았건만 둘은 “옛 모습 그대로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6·25전쟁 당시 어려운 처지의 자신을 도왔던 한 미군 장교를 잊지 못하다 거의 60년 만에 미국까지 찾아온 한 70대 한국인이 미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시 지역 언론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1951년 수원 미군비행장의 한정수 씨(가운데)와 제럴드 윙거 중위(앉은 이). 젊은 얼굴이 앳돼 보인다. 당시 비행중대 부관으로 있던 윙거 중위는 개인적 친분도 없었지만 한 씨의 딱한 사정을 듣고 선뜻 거금을 내놓았다.
지역일간지 인디펜던트메일 등이 소개하는 한 옹의 사연은 이렇다. 당시 수원농과대학(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1학년이던 그는 수원 미군비행장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며 생활을 연명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일자리를 관둔 한 옹은 다음 학기 등록금조차 마련할 방안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윙거 중위라고 소개한 한 장교가 사정 얘기를 듣더니 “걱정 마라. 방법이 있을 것이다”라며 그를 다독였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소.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중위님이 등록금 15만 원을 대신 내줬다는 겁니다. 그 정도면 쌀 30가마를 살 수 있는 큰돈이거든요. 한번은 ‘왜 이렇게 도와주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말없이 미소만 짓던 모습이 떠오릅니다.”(한 옹)
하지만 1953년 윙거 중위가 전근을 가며 이들은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당시 윙거 중위는 후임자에게 부탁해 한 옹의 나머지 학비도 모두 챙겨놓고 떠났다. 그 덕분에 무사히 졸업한 그는 농림부 사무관, 농협대학 교수 등을 지내며 살아왔다. 그러나 오래도록 은혜를 잊지 못하던 한 옹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내며 수소문했으나 은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올해 4월 한 언론에 소개된 사연을 본 퇴역 한국인 대령이 도와 극적으로 행방을 알게 됐다.
지난달 26일 미 새크라멘토에 있는 윙거 중위의 자택에서 만난 한 씨(왼쪽)와 윙거 중위. 반갑게 포옹하며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사진 출처 새크라멘토비 홈페이지사실 윙거 중위는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한 옹의 방문을 말렸다. 윙거 중위는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멀리서 찾아오는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며 “늙고 병든 모습을 보고 실망할까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한 옹의 간청에 감동해 결국 두 사람은 지난달 26일(현지 시간) 윙거 중위의 집에서 재회했다.
“당시 그 돈은 내겐 부담스러운 액수도 아니었어요. 한 군의 잠재력을 안타깝게 여긴 하늘이 도운 걸 겁니다. 이후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니 그게 더 기쁩니다. 며칠 동안 이 친구와 함께 이곳저곳 구경하렵니다. 옛 친구를 만나는 기쁨은 뭣보다 크더군요.”(윙거 중위)
“중위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어도 눈감을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야 생애 가장 큰 소원을 풀었어요. 베푸는 삶을 가르쳐 주신 분.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한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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