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김치5’… 흥남 철수 은인 60년만에 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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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3일 03시 00분


피란선에서 출생 이경필씨, 美선원 3명과 5일 첫 만남

로버트 러니 씨
로버트 러니 씨
#1. 1950년 12월 23일 새벽 함남 흥남부두. 눈보라가 휘날렸고, 칼바람이 불었다. 영하 20도가 넘었다. 중공군에 밀려 함흥∼흥남 전선으로 내려온 유엔군사령부는 12월 초 남쪽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민간인들도 12월 12일부터 피란길에 올랐다. 23일은 흥남철수의 마지막 날이었다. 흥남 구룡리에 살던 이석초 씨(당시 37세)도 만삭인 아내(당시 28세)의 손을 잡고 부두에 왔다. 피란민을 태우고 갈 마지막 미국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호(7600t)가 정박해 있었다. 이 배에는 레너드 라루 선장과 로버트 러니 사무장 등 47명이 타고 있었고 피란민을 화물칸에 태워도 2000명 이상은 태우기 힘들었다. 미국 선원들은 ‘하느님께 운명을 맡기자’며 부두에서 떨고 있던 피란민 1만4000여 명을 화물칸과 갑판 위에 태웠다. 의료진, 통역관, 화장실, 물과 음식은 없었다. 생리현상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다. 23일 오전 11시 부두를 출발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쉼 없이 달려 25일 낮 12시 경남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혹한 속에서도 한 명도 희생되지 않았다. 되레 25일 오전 9시까지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났다. 피란민들과 미국 선원들은 그 순간을 지켜봤다. 선원들은 ‘한국의 상징인 김치가 생각난다’며 5명을 태어난 순서대로 ‘김치1’ ‘김치2’ ‘김치3’ ‘김치4’ ‘김치5’라고 불렀다. 이 씨의 만삭 아내가 크리스마스에 낳은 아이가 ‘김치5(파이브)’다. 빅토리호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조한 배로 2004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미국인들은 사흘간 일어난 일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렀다.

1950년 대규모 흥남철수를 담당했던 선박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철수 도중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한 명이 이경필 씨다.경남 거제시 장승포동에서 현재 수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 씨가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자리한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거제=최재호 기자 choijh92@donga.com
1950년 대규모 흥남철수를 담당했던 선박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철수 도중 5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한 명이 이경필 씨다.경남 거제시 장승포동에서 현재 수의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 씨가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에 자리한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거제=최재호 기자 choijh92@donga.com
#2. 60년이 흘렀다. 경남 거제시 장승포동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 이경필 씨(60)가 피란선에서 태어난 바로 그 ‘김치5’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환갑이 된다. 60년 전 그날 거제도에 온 뒤로 쭉 살고 있다. 1996년 돌아가신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마시면 고향 얘기를 하면서 “넌 큰 배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같이 피란을 온 아버지 친구들은 껄껄 웃어댔다. 그 의미와 김치5라는 별명은 20대가 돼서야 알았다. 음력 생일상을 받은 형제들과 달리 자신은 왜 음력이 아닌 양력 생일을 쓰는지 알게 됐다. 아버지는 “미국 선원들을 절대 잊지 마라. 너와 우리 피란민을 살려준 은인들이다”라고 항상 당부했다. 라루 선장과 러니 사무장 이름도 들었다.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전쟁 뒤 미국으로 돌아간 라루 선장은 ‘하느님이 배의 키를 잡았기에 1950년 12월 기적이 일어났다’며 수도사가 됐고, 몇 년 전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니 사무장은 미국 뉴욕 주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1953년 아버지인 이석초 씨에게 안겨 있는 이경필 씨의 세 살 적 모습. 흥남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다 피란을 온 아버지 이씨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거제에 차린 사진관 이름을 ‘평화사진관’으로 결정했다. 사진 제공 이경필 씨
1953년 아버지인 이석초 씨에게 안겨 있는 이경필 씨의 세 살 적 모습. 흥남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다 피란을 온 아버지 이씨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며 거제에 차린 사진관 이름을 ‘평화사진관’으로 결정했다. 사진 제공 이경필 씨
이 씨의 바람이 곧 이뤄지게 됐다. 사단법인 흥남철수작전기념회는 5일 오전 11시 거제시 고현동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내 흥남철수작전기념비 앞에서 ‘생명의 항해, 평화의 닻을 내리다’를 주제로 김치5와 미국 선원들의 만남을 준비했다. 당시 러니 사무장(83)과 멀 스미스 초급기관사(82) 등 빅토리호 선원 3명이 거제도로 온다. 이에 앞서 3일 서울 전쟁기념관, 강원 속초국제항, 경북 포항 해병1사단 등지에서도 흥남철수작전 6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이참에 김치1∼4도 꼭 보고 싶네요. 4명은 연락이 닿지 않는가 봐요. 미국 시카고와 부산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리던데….” 3일 장승포가축병원에서 만난 김치5는 선원 3명에게 읽어줄 감사 편지를 쓰고 있었다. “빅토리호 선장과 선원들은 피란민 1만4000여 명과 제 생명의 은인입니다. 크리스마스 기적을 수행하신 당신들의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거제=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6·25 60주년…전쟁을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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