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LG전자 회장 지낸 이헌조 고문, ‘한국 국격 높이는 길’ 고전 인문학 연구단체 기부
1995년 LG전자 회장을 지낸 이헌조 고문(78·사진)이 올 3월 이우성 전 성균관대 교수(85)가 만든 ‘실시학사(實是學舍)’라는 고전 인문학 연구단체에 사재 70억 원을 기부한 것으로 9일 뒤늦게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이 고문이 붙인 조건은 “실학(實學) 연구에 써 달라”는 한 가지뿐이었다. 이 고문의 기부는 한국 정신문화의 한 축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지만 연구 환경은 열악했던 국내 실학 연구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1957년 락희화학공업(LG화학의 전신)에 처음 입사해 1998년 LG 인화원 회장에서 물러나기까지 40년 넘게 현장을 지키면서 LG전자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특히 평소 깊은 인문학적 관심을 바탕으로 1987년과 1989년 두 차례의 대규모 노사 분규로 LG전자가 위기에 처했을 때 노사화합을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이 전 교수는 조선 실학파를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로 처음 분류하고 국내 실학 연구계의 고전으로 꼽히는 ‘한국실학연구서설’을 펴낸 국학계의 거두. 한국 중세사에도 해박해 신라시대에 사유 재산제도가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 이를 부인한 일제의 식민사관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평소 한학과 한시에 조예가 깊었던 이 고문은 10여 년 전부터 이 전 교수와 ‘난사(蘭社)라는 한시 모임을 통해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조순 전 총리, 김종길 전 고려대 교수 등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한시를 짓고 좌장인 이 교수로부터 첨삭을 받으면서 문예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 전 교수의 제자로 실시학사에서 이사직을 맡고 있는 송재소 전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이 고문이 70억 원을 전달하면서 실학 연구에 써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았다”며 “이 고문은 ‘한국 실학 연구를 통해 장기적인 안목에서 한국의 국격을 높이고 국가 발전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오랫동안 기업 경영을 하시면서 실사구시의 실학에 매력을 느끼신 것 같다”며 “순수 기초학문에 이런 거액을 투자한 것에 놀랐다”고 덧붙였다.
이 고문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최근 설립된 재단법인 실시학사는 조선 실학의 선구자인 다산 정약용과 성호 이익을 연구하는 학자 10명에게 총 1억 원의 연구비를 이미 지원했다. 이어 실시학사는 올해 안에 연암 박지원과 홍대용 등을 연구하는 학자 15명에게 1000만 원씩 추가로 지원할 계획이다. 한편 이 고문은 이날 동아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이런 일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극구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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