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난도’ 서울대 교수
“나도 고시 실패, 교수임용 좌절… 때론 시련서 새 길 찾는게 인생”
요즘 서울대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www.snulife.com)에 들어가 보면 고시 준비생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서를 썼다’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다.
‘시험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이제는 정말 생에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사장 앞 도로에 뛰어들었는데 상해만 입고 끝. 한남대교에서 뛰어내리려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기겁을 하며 죽을힘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다시 실패. 집에 와서는 목을 맸는데 이번엔 동생이 발견. 난 죽을 자격도 없는 사람인가.… 몇 년의 (고시) 실패를 거듭한 끝에 내게 남은 건 막연한 증오, 세상에 대한 분노, 쓰레기 같은 나 자신에 대한 혐오밖에 없다.… 내 아버지 어머니는 손댄 시험마다 떨어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몇 년씩 1차(시험)에 떨어진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작성자가 ‘필명 숨김’으로 되어 있는 A4 2장 분량인 이 글의 작성일시는 2월 20일 오전 5시 20분. 지난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 학교 성악과 교수의 제자 폭행 논란 글을 밀어내고 순식간에 조회수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밑에 달린 댓글들은 하나같이 자살을 만류하고 있었다. 그중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꼭 읽어보라”는 조언도 있었다. ‘1만 부만 팔려도 베스트셀러’라는 초불황 출판시장에서 발간 두 달 만에 30만 부를 넘겨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바로 그 책이다.
‘청춘’이 아니어서인가, 기자는 책에 별 감흥이 없었다. 학생들의 아픔을 위로해 주려는 저자의 진정성은 다가왔지만 이 정도 내용이라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기계발서에 다 나와 있는 것들 아닌가. 그렇지만 자살을 생각하는 친구에게 권할 정도로 청춘들이 너도나도 사 보고 있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터. 저자인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48)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그의 이야기’보다 그가 만났던 ‘아픈 청춘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서울대 학생들은 취업 상황 등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학생들도 취업에 대한 고민이 심각한가.
“어떤 점에서는 서울대생들이 오히려 스트레스가 많다. 많은 사교육비를 지불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을 통해 서울대만 들어오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학점, 어학연수, 봉사활동, 인턴 등 스펙 경쟁이 다시 시작된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지만 무엇을 위해 스펙을 쌓는지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다. 친구들이 다 하니까, 부모가 권하니까, 가만히 있자니 불안하니까 각종 공모전을 준비하고 연수를 가고 시험을 친다. 그렇게 애를 써도 원하는 직장에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미 학교에서 제자들 말에 귀 기울여 주는 교수로 유명했다. “1학년 교양과목인 ‘소비자와 시장’은 수강신청 마감에 5분이 안 걸릴 정도”(김 교수의 말)로 인기 교수다. 비결은 수업시간에도 학생들의 고민에 공감하려고 노력한 덕분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면담을 많이 신청하는 편이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e메일을 주고받다 수업시간에 들어가 아이들 얼굴을 보면 ‘혹시 얘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그러면 수업 끝나고 홈페이지에 ‘오늘 수업 너무 좋았다’ ‘교수님이 이런 말씀 하셨는데 제 이야기도 좀 들어 달라’며 아이들이 마음을 연다. 그러면 또 듣게 되고 그러면서 차츰차츰 고민을 더 많이 알게 됐다.”
방황하는 청춘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은 바로 자신의 삶이 방황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지만 고시에 실패해 대학원(행정학)으로 방향을 틀었고 교수 임용이 안 돼 속을 끓여본 경험도 있으며 결국엔 전공이 아닌 소비자학으로 방향을 틀어 교수가 됐다.
실제로 기자가 그의 책을 읽은 한 청춘(대학원생)에게 물었더니 “애초 선택한 길에서 계속 방향을 바꾸고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니 귀 기울여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김 교수가 책까지 펴내게 된 데는 2004년 미니홈피에 올린 글이 시작이 되었다. 독한 슬럼프에 빠졌다는 제자에게 힘을 주기 위해 쓴 ‘슬럼프’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교수라는 직업은 밖에서 점검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슬럼프, 나태에 훨씬 쉽게 깊게 빠져. 내가 자주 그래. 자네들에게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하지만) 나태를 즐기지 마. 몸을 움직여. 무엇이든 오늘 해. 아무리 독한 슬픔과 슬럼프 속에서라도 여전히 너는 너야. 조금 구겨졌다고 만 원이 천 원 되겠어? 자학하지 마, 그 어떤 경우에도.’
차분한 어조로 아픈 영혼과 공감하면서도 힘을 주는 이 글은 이른바 ‘펌질’(인터넷에 있는 남의 글을 복사해 올리는 것)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출판사 편집자가 책을 써보라고 하기에 ‘서울대 교수가 청춘을 위로한다고 쓰면 (세상 사람들이) 재수 없어 한다’고 거절했지만 김 교수는 학생들의 고민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소비자학자답게 ‘고객’인 청춘들의 마음을 읽는 데 주력했다. ‘타 학교 학생을 4명 이상 모아오는 제자들’에게 밥을 샀고 사비를 들여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까지 했다.
“결론은 서울대나 지방대나 전문대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설문조사에서 놀랐던 것은 교수와 학생 간 관계였다. 고민이 있을 때 교수와 상담한다고 답한 학생은 겨우 1.5%였다. 아무래도 지방대는 교수나 학생들이 좀 여유가 있어서 대화를 많이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부모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가 고작이었다.”
―아이들을 보듬어주는 것도 좋지만 책임 있는 어른이라면 꾸짖는 노력도 해야 하지 않을까.
“꾸짖기 전에 먼저 보듬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기성세대는 20대를 보고 ‘얼마나 좋을 때냐’고 하지만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 좋은 청춘을 만끽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는 “청년실업에 대해 사회과학적 현실 진단과 대안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며 더 언급하기를 자제했다. “논쟁의 중심에 서서 깃발을 잡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그는 지난해 한 신문에 쓴 칼럼의 단어 하나를 꼬투리 삼아 제자들이 악플을 달아대는 바람에 심한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책에서 누구보다 강한 어조로 청춘들을 위로한 그이지만 “사실은 나 스스로 나약하고 소심한 사람”이라고 했다.
―82학번인데 그때와 지금의 청춘들을 비교한다면….
“사제 관계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했다. 학생운동 할 거 다했지만 취업 걱정이 그리 많지 않았다. 과거에는 선택의 폭이 좁았던 데 비해 지금은 오히려 선택이 많다는 게 방황의 원인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 학생들은 소비에 일찍 눈을 뜬다. 엊그제 TV 토크쇼를 보았는데 남자 대학생이 ‘예쁜 여친(여자친구)과 좋은 차 중에서 뭘 선택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좋은 차’라고 하더라. 나 같으면 당연히 예쁜 여친일 텐데…(웃음). 물질에 일찍 눈을 뜬 요즘 아이들은 대학생 때까지는 부모의 재력에 기댈 수 있지만 졸업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좋은 직업=높은 연봉’이다.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보다 변호사가 좋은지, 의사가 좋은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좋은지를 놓고 고민한다. 꿈이 있다 해도 그 꿈을 가지고 지금 당장 소비할 수 없으니 쉽게 포기한다.”
―소비자학자인데 소비에 대해 부정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런 말이 아니다. 나도 우리 학생들이 좋은 차 탔으면 좋겠다. 하지만 진정으로 물질주의자라면 지금 루이뷔통 가방 사는 데 돈 쓰지 말고 한 글자라도 더 배우고 남과 대화하고 여행을 다녀서 자기를 키우라는 거다. 최고의 재테크는 높은 연봉을 ‘나중에’ 받는 거다. 인생은 기니까 지금 쓰지 말고 모아놨다가 나중에 연봉을 몇억 원 받는 사람이 돼서 루이뷔통 사라는 거다.”(그의 말이 과연 미래를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바람직한 해결책일까 잠시 의문이 들긴 했지만 논쟁이 될 것 같아 추가 질문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요즘 아이들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라고 했다.
“혼자 자라고 형제가 있어도 방을 따로 쓰는 아이들이 많다. 예전엔 친구끼리도 같이 놀았지만, 요즘은 혼자 게임한다. 수업도 혼자 듣는다. 헤드폰만 끼면 세상과 단절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남과 공감하고 역지사지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부모들의 문제는 없나.
“양극단이다. 연예인 매니저처럼 자식을 통제하고 관리하거나 아예 무관심하다.”
―서울대 입학하는 여학생 비율이 40%인데 이른바 ‘알파 걸’들은 어떤가.
“알파라는 건 공부에만 해당하는 말이다. 살아보면 공부가 전부가 아니잖은가. 시험은 잘 보지만, 연애도 못하고 감정통제도 서투르다. 또 이 사회에는 아직 ‘유리천장’이 있다. 내가 보기에 잘난 여자들이 선택하는 전략은 페미니스트 아니면 ‘여우전략’이다. 이상적인 여학생은 중간쯤 어디다. 남자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주체성을 가지는 여자랄까.”
―스스로 생각하는 사도(師道·스승의 길)란….
“학생이 나의 수단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학생의 수단이 되어 주는 것이다.”
‘고객이 왕’임을 강조하는 소비자학자다운 대답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입는 학교점퍼를 걸치고 ‘어장 관리’(실제 사귀지는 않으면서 마치 사귈 것처럼 친한 척하면서 주변 이성들을 동시에 관리하는 것)니 하는 학생들의 용어도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교수’라는 권위 의식이 없어 보였다.
김 교수를 만난 날은 토요일(26일) 오전이었다. 그 추웠던 겨울이 언제였나 싶게 교정엔 봄기운이 완연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마음엔 정말 봄이 오고 있을까. 문득 맨 앞에 소개한 고시생의 유서가 떠올랐다.
‘내가 수능을 치던 해, 언어영역 끝나고 그 학교에서 여학생이 투신자살했다. 그때 나는 그 여학생이 나약하고 비겁하다고, 수능 망치면 인생 쫑나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그 여학생의 입장이 되어 학교 옥상에 서 있었다.… 한때 자랑스러운 자식이었고 즐거운 친구였던 날 이렇게 병들게 한 건, 고시라는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꺾여버린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미치게 한다.… 이제 와서 (고시를) 포기하면 지난 내 청춘이 온전히 날아가는 것 같고, 영원히 열등감 쩌는 루저로 살아갈 것 같다. 두렵다.’
그 고시생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방학에다 주말인데도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생들을 뒤로하며 교정을 내려오는 마음이 무거웠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김난도 교수 ::
―1963년 서울 출생 ―1986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89년 서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 ―1996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졸업(행정학 박사) ―1997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임용 ―1998년 한국정책학회 학술상 ―2006년 서울대 교육상 ―2007년 한국갤럽 최우수 박사학위논문 지도공로상 ―2008년 한국소비자학회 최우수 논문상 ―2010년 한국소비문화학회 최우수 논문상
저서: ‘사치의 나라―럭셔리 코리아’ ‘트렌드 코리아 2009’ ‘트렌드 코리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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