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정의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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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4일 03시 00분


“日서 한국인으로 살기란… 하지만 어떤 인생이든 희로애락이 함께 있어”

자신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무대의 곱창구이집 ‘야끼니꾸(燒肉) 호루몬(ホルモン)’ 간판 앞에 앉은
정의신 감독. 일본인들이 버리는 곱창을 구워 팔던 1970년대 재일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은 그의 작품은 한일합작으로 2008년 일본에서 초연됐다. 이듬해 그는 일본 연극계의 유명한 상을 모두 휩쓸어 일본
문화계를 놀라게 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자신이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무대의 곱창구이집 ‘야끼니꾸(燒肉) 호루몬(ホルモン)’ 간판 앞에 앉은 정의신 감독. 일본인들이 버리는 곱창을 구워 팔던 1970년대 재일한국인들의 비참한 삶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따뜻함과 유머를 잃지 않은 그의 작품은 한일합작으로 2008년 일본에서 초연됐다. 이듬해 그는 일본 연극계의 유명한 상을 모두 휩쓸어 일본 문화계를 놀라게 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연극이 끝났다. 불이 꺼지고 관객들이 빠져나간 극장에 적막이 흘렀다. 오늘(12일 오후 7시∼10시) 공연도 성황이었다. 분장실에서 정의신 감독(54)을 만났다. 감동을 전하는 관객들과 축하 인사를 건네는 한국 및 일본 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표정이 밝지 않았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동북부 센다이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말을 잃은 사람이 정 감독뿐이겠는가마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기자는 위로의 말조차 쉽게 건넬 수 없었다. 그는 현재 일본에서 영화, 연극, TV드라마 장르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중 한 사람이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으로 일본 문화계에서 성공한 재일한국인이다.

한국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합작해 9일부터 상연하고 있는 ‘야끼니꾸 드래곤’(서울 예술의전당·20일까지)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일본 연극계에선 처음 있는 일로, 재일한국인의 삶을 주제로 다룬 이 연극은 2008년 4월 일본 초연 때 11일간 전회 매진, 수차례 기립박수를 받아 화제가 됐다. 2009년에는 일본 연극계의 이름 있는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다. 마침, 그의 필모그래피(작품 이력)에 1995년 고베 대지진의 아픔을 다뤘다는 내용이 있던 것이 생각났다.

“‘봄의 부엌’이라는 작품이다. 지진으로 가족과 집을 잃은 자매 이야기다. 이웃들이 폐허가 된 고향을 버리고 떠나지만 자매는 지진으로 지붕이 뻥 뚫린 집을 떠나지 않는다. 대지진이 할퀴고 간 땅은 시간이 지나면 복구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되돌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당시 작품 취재를 위해 피해자를 많이 만났다는 그는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의 ‘트라우마’(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는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하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난 뒤 허망함, 상실감, 혼자만 살았다는 죄책감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순간, 기자는 몇 년 전 미국 뉴욕행 비행기 옆 좌석에서 만난 한 일본 중년여인이 떠올랐다. 고베 대지진으로 남편과 아이들, 터전까지 잃고 한때 실어증에 시달렸다는 그녀는 쉰이 넘은 나이에 상처가 생각나지 않는 타국에서 살고 싶어 고향을 등지기로 했다고 낯선 여행자에게 맘을 열었다. 발붙이고 살던 땅이 하루아침에 꺼져 버린 것을 경험한 사람의 황폐함이 저런 것이구나…. 정 감독의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상처받은 사람이다.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의 무대는 1969년 일본 오사카 빈민촌의 한 마을. 최하층의 삶을 살고 있는 재일한국인 김용길은 처와 자식 넷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곱창집 ‘야끼니쿠 호루몬’을 운영한다. ‘야끼(燒き)니꾸(肉)’는 일본말로 구운 고기, 호루몬(ホルモン)은 곱창을 말한다. 소·돼지 내장 등 버리는 고기를 통칭하기도 한다. 연극 제목 ‘드래곤’은 주인공의 이름 ‘용(龍)’에서 따온 것. 가장 하찮은 음식을 신화 속 영물(靈物)인 ‘용’으로 바꾼 것은 비루한 삶을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유머와 경쾌함, 희망을 잃지 않는 연극 속 메시지와 닿아 있다.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는 모두 작가의 가족과 어릴 때 만났던 이웃 재일한국인들의 삶이 재료가 됐다.

“나는 오사카 히메지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성벽을 따라 형성된 빈민촌이 내가 살던 곳이었다. 곱창구이집을 운영하는 재일한국인 할머니도 있었다.…(나의) 아버지는 고물상이었고 어머니는 청소부였다. 아버지는 일제 때인 15세에 가출해 일본으로 혼자 건너왔다. 독학으로 히로시마사범대에 들어갔는데 2학년 때 징병으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뒤 재일한국인 2세였던 어머니와 결혼한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배에 먼저 실어 보낸 가재도구가 바닷속으로 잠기면서 알거지가 되었다. 결국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사람은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14세 때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재일한국인 신랑에게 시집왔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손자에게 ‘고향에 가고 싶다’ ‘이대로 죽고 싶다’는 말을 되뇌던 할머니를 보면서 자랐다는 그는 “인생이란 게 그리 멋진 것이 아니구나, 사람은 죽기 위해 사는 거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할머니 때문에 내 인생이 꼬여 버린 셈(웃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가 나와도 유머를 잃지 않았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늘 상황을 밝게 보려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참했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감독 자신만의 치열했던 생존법이기도 했으리라.

“교육열이 유난히 높았던 아버지는 우리 4형제에게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남으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세 아들 중 둘이 의사, 하나는 약사가 됐다. 나는 문과 기질이 강했다. 아버지는 ‘밥을 굶게 된다’고 말렸지만 나는 고집을 부렸다.”

그에게 한국은 한동안 아무 이미지나 개념이 떠오르지 않는 먼 나라였다. 그러다 고교 시절 도서관에서 김지하 시인의 시 ‘오적(五賊)’ 일본어판을 읽고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이라는 낱말이 나오는 책이나 잡지를 찾아 읽고 도자기 같은 미술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 주변에 충격선언을 했다. ‘데이 요시노부’(정의신의 일본식 발음) 대신 ‘정의신’이라 불러 달라고 한 것. 청소년기엔 너나 없이 가난해서인지 특별히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대학(교토 도시샤대 미학 전공)에 들어가서는 달랐다. ‘히메지 빈민촌에 살던 조선인 정의신’은 배척 차별 괄시의 대상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성적이었던 그는 더욱더 외톨이가 되어 갔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일본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아버지 말이 맞았다. 1970년대 재일한국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란 신발공장이나 빠찡꼬 종업원, 고물상, 곱창집 정도였다. 최고 직업이 기술자격증을 갖는 약사나 의사였다. 변호사도 못했다. 기업들도 재일한국인은 채용하지 않았다. 교사도 불가능했다.” 결국 대학을 휴학하고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뜻밖에 그를 구원한 것은 영화였다. 시간만 나면 극장으로 달려가 1년에 500여 편을 봤다. 그러면서 서서히 “비현실의 세계, 환상의 세계야말로 현실에 발 딛지 못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어렵게 들어간 사립명문대를 그만두고 요코하마 방송영화학원(현 일본영화학교)에 진학한다.

처음엔 연기자 생활로 시작했다. ‘바보’ ‘말더듬이’가 단골 배역이었지만 “나 같은 인간도 남들에게 쓰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처음 깨닫게 해준 고마운 시간이었다”고 한다. 몇 년 뒤 극작가와 연출로 업을 바꿨다.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에는 유난히 ‘팔자’나 ‘운명’이란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것을 믿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인생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비참해도 슬픔 하나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어떤 인생이든 어떤 상황이든 희로애락이 뒤섞여 있다.”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이런 나도…살고 있으니까…관객 여러분도 웃고, 울고 하면서 힘을 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 순간, 시종일관 담담했던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갑작스러운 반응에 기자가 당혹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말수가 적고 수줍음도 많았다. 그동안 겪었던 서러웠던 삶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표현하길 꺼렸다. 처음엔 그런 그가 답답했지만 나중엔 이해가 됐다. 상처를 드러내 동정 받고 싶지 않다는 강한 자존감,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닌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본사회에 동화되지 않는 길을 스스로 선택해 살아오면서 겪은 내상(內傷)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화제를 바꿨다. 극본 쓰기의 달인 격인 그에게 글을 잘 쓸 수 있는 비결이 따로 있을까.

“딱히 없다. 다만, 가짜를 싫어한다. 막연히 알고 있는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한다거나, 안 되는 걸 되는 것처럼 한다거나,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인용하는 것을 싫어한다. 연기도 가짜 연기는 싫어한다. (배우가) 정말 제대로 느끼지 않는다거나 이러면….” 그때 갑자기 옆에서 통역을 도와주던(정 감독은 한국말을 못했다) 극단 미추 기획실 박상현 실장이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진다”며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야끼니꾸 드래곤’은 시종일관 유쾌하고 따뜻하다. ‘재일한국, 조선인의 전쟁의 기억이자 지금도 존재하는 차별, 그런 무거운 테마를 다루고 있으나 경쾌하다. 해외명작의 분위기가 곳곳에 보인다.’(아사히신문 2008년 4월 22일)

대사들은 한국어와 일본어(자막 처리)가 번갈아 쓰이지만 이물감이 들지 않았다. 연기자들의 출중한 연기 덕도 있겠지만 그만큼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졌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다. ‘한일의 배우들이 만들어낸 무대는 단순한 교류의 영역을 넘어 살아있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시종일관 울린다.’(요미우리신문 2008년 4월 23일)

며칠 전만 해도 일본 정가를 뒤흔든 외상의 사퇴와 총리의 정치생명까지 흔들었던 일본 정치헌금 사건에서도 확인됐지만 일본사회에서 재일한국인은 아직도 외국인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중단을 요구하는 한일 공동선언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일본 국회의원이 동료 의원들의 성화에 못 이겨 물러난 것도 바로 엊그제 일이다. 이처럼 일본은 우리가 모든 것을 허물없이 받아들이기엔 아직도 먼 나라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모습은 대재앙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 감독은 재일한국인으로서 겪은 설움을 원망이나 증오 대신 연민과 따뜻함으로 승화해 한국과 일본을 감동시켰다. 진정 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리라. 재난에 처한 이웃나라 일본을 진심으로 돕는 길은 오랜 시간 타향살이를 하며 영혼에 상처를 입고 살았던 또 다른 한국인들을 돕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정의신 감독

-1957년 일본 효고 현 히메지 시 출생
-1978년 도시샤(同志社)대 중퇴
-1982년 요코하마 방송영화학원 졸업 후 영화사 무대조수로 일을 시작
-1983년 극단 ‘검은 텐트’ 입단
-1987년 극단 신주쿠료 잔파쿠(新宿梁山泊) 창립 멤버
-1996년 프리랜서

주요 작품 및 수상 경력

-1993년 ‘더 데라야마(寺山)’ 기시다쿠니오(岸田國士) 희곡상
-1994년 ‘달은 어느 쪽에서 뜨는가’ 마이니치 영화콩쿠르 각본상,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 각본상, 일본아카데미 최우수각본상
-1999년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 키네마순보 각본상,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각본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오사카영화제 최우수각본상
-2003년 ‘OUT’ 제57회 마이니치영화콩쿠르 각본상
-2004년 ‘피와 뼈’ 키네마순보 각본상, 일본아카데미 우수각본상, 제27회 히메지 시 예술문화상 예술상
-2009년 ‘야끼니꾸 드래곤’ 기노쿠니아 연극상, 쓰루야난보쿠 희곡상, 아사히신문 무대예술상 최고대상,
요미우리신문 연극대상 최우수작품상 우수연출상, 문부과학대신상(우리나라 문화부장관상에 해당하는 상으로 재일한국인으로는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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