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광화문 현판 균열’ 논란 가슴앓이 신응수 대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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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23일 03시 00분


“광화문 현판 균열 할 말은 많지만… 애꿎은 나무 탓 안했으면…”

인터뷰를 마친 뒤 나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신응수 대목장. 신 대목장의 강릉 우림목재엔 한때 200만 재를 켜낼 수 있는 나무가 있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인터뷰를 마친 뒤 나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신응수 대목장. 신 대목장의 강릉 우림목재엔 한때 200만 재를 켜낼 수 있는 나무가 있었다. 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광화문 현판 균열 소동’은 새 현판 제작에 쓰일 적송(赤松)을 찾아낸 것으로 일단락됐다. 현판 글씨를 한글로 할 것이냐, 한자로 할 것이냐는 논란은 또 다른 문제다.

문화재청의 현판 제작위원회 위원들이 새 현판의 재목으로 결정한 적송은 모두 세 본(本). 강원 양양군 법수치에서 1994년 벌채한 265년생(生)과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에서 1995년 베어 온 226년생, 204년생이다. 소유주는 광화문 복원에 참여한 신응수 대목장(69). 세 본의 적송 원목은 신 대목장이 운영하는 강릉 우림목재에 ‘광화문 현판용 목재’라는 종이 표지판을 달고 가로누워 있다.

문화재청 위원들은 지난달 24일 우림목재를 방문해 현판용 적송 3본을 찾아낸 뒤 바로 판재로 켜 볼 계획이었으나 ‘비가 와서 수분을 머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일정을 연기했다고 한다.(조선일보 4월 25일자) 가로 428.5cm, 세로 173cm의 현판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통나무를 얇게 켜 판재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신 대목장의 설명은 좀 달랐다. 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마뜩잖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18일 강릉 우림목재를 찾아갔다. 우림목재는 그가 20년 전 ‘급하다고 생나무를 구해다 집을 짓는’ 일만은 막고 싶어 차린 곳이다.

―보도를 보니 문화재청에서 대목장께 현판 균열의 ‘하자 보수’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던데 혹시 ‘판재로 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게 그 때문입니까.

광화문 새 현판의 재목으로 결정된 세 본 중의 하나인 265년된 적송.
광화문 새 현판의 재목으로 결정된 세 본 중의 하나인 265년된 적송.
“(언성을 높이며)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럼 다른 데서 나무를 가져다 쓴 뒤 문제가 생기면 그 제재소에 ‘하자 보수’를 물을 겁니까? 각자장(刻字匠)이 나무를 가져간 뒤 건조도 제대로 안 하고 본드로 붙여 현판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터진 것이지 나무(원목)의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장도 (대목장처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장인입니다. 장인이 나무가 나쁘면 받지 말든지, (현판으로 쓰기엔) 덜 말랐으면 인공건조라도 해서 말리든지…. 공장(우림목재 제재소)에선 아무것도 모르고 치수대로 켜 줬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현판용인지도 모르고 나무를 줬다는 말입니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문화재청 감사반이 조사하러 왔을 때 내가 녹음기를 놓고 얘기하자고 했어요. 나는 그게 현판에 쓸 나무인지도 몰랐어요. 얘기를 안 해주는 데 현판인지, 마루인지 어떻게 압니까? 그리고 목재소엔 나무가 수십만 재(才) 쌓여 있는데 각자장이 직접 현장에 와서 보고 나무를 주문해야지 서울에 앉아 전화로 얘기한다는 게 참….”

―그래도 어찌됐건 국민들은 신 대목장이 광화문 복원 공사의 ‘총감독’인 걸로 알고 있으니까 서운한 게 많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잘못된 겁니다. 언론에 제발 그렇게 내지 말라고 했는데도 왜 그런 타이틀을 붙이는지…. 예전엔 도편수 밑에서 다 그런 체계로 움직였지만 광화문 공사는 분야별로 장인이 다 지정돼 있습니다.”

―그럼 복원 공사는 누가 총지휘하는 겁니까.

“감리단이 있고, 문화재청의 감독이 있지 않습니까?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얽힌 사연이 많습니다. (새 현판 나무로 결정된) 저 나무 세 본이면 3000만 원쯤 하지만 목수는 마음만 맞으면 공짜 집도 지어줍니다. 그런데 (하자 보수 운운하면서) 나무나 켜달라고 하면 주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그날 나무를 켜지 않은 겁니다.”

실제로 신 대목장은 2004년 강릉시의 요청으로 시청 앞 ‘제야(除夜)의 종각’을 세울 때 공사비로 책정된 8억3000만 원 이외에 개인 돈 1억 원을 더 넣었다. 그는 2005년 펴낸 ‘목수’라는 책에서 “강릉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살아왔고 강원도의 소나무들로 집을 지어 평생을 먹고 자식들 공부시켰으니 그 고마움을 무엇으로 다하겠느냐”고 썼다. 광화문 복원 공사만 해도 기둥을 세 번이나 바꿨다. 첫 번째, 두 번째 세웠던 나무는 ‘헌 나무’가 될 수밖에 없지만 광화문 복원의 역사적 의의나 ‘대목장 신응수’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한 치도 소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너무 현판 균열 책임 문제에만 집중되는 듯해 화제를 좀 돌렸다.

―동아일보 인물 DB를 보니까 존경하는 인물로 박정희 대통령을 꼽았던데 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엊그제가 5·16 50주년이었습니다만….

“(웃으며) 우리야 정치는 잘 모르지만 박 대통령에 관한 기사는 다 읽습니다. 우리 어릴 땐 정말 밥을 못 먹었습니다. 그런 시절을 끝낸 것 아닙니까? 그리고 나도 어린 나이에 참여했지만 1962년 숭례문 중수 공사만 해도 손도 못 대고 있다가 5·16이 나고 나서 시작한 것 아닙니까? 불국사도 수백 년간 방치돼 있던 걸 1970년부터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직접 헬기를 타고 와 공중에서 보고 단청 색깔을 지적할 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실 그 전엔 목수들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 시절에 들어와 사방에서 유적 보수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나도 처음엔 윤보선 대통령을 찍었는데 사는 게 나아지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책을 보니 ‘대관령 고개를 나만큼 많이 넘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라고 술회하셨던데 다 나무 때문입니까.

“목수가 믿을 것은 갈고닦은 기술과 제 손 같은 연장, 그리고 믿음직한 나무밖에 없습니다. 한때는 산림청 직원이 큰 소나무를 발견하면 ‘신응수 눈에 띄지 말아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다는 얘기까지 들었습니다.(웃음)”

―유달리 강원도 소나무, 그중에서도 적송에 ‘집착’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에 백두산 소나무라는 말을 듣고 장백산맥 홍송을 들여온 일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우리 소나무만 못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백두산에서 400km인가 떨어진 곳에서 자란 나무라고 하더군요. 우리 건축물, 특히 궁궐 건축물의 힘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적송이 으뜸인데 200년에서 300년은 자라야 훌륭한 재목이 되기 때문에 구하기 어렵습니다. 국내에서 적송이 나는 곳은 강원도 양양에서 경북 울진에 이르는 태백산맥 줄기뿐입니다. 평창만 가도 나무가 무릅니다. 산도 중간 이상 올라가는 높이의 악조건 속에서 자란 나무가 더 좋습니다. 산 아래에서 자란 나무는 외관상으로는 좋지만 실제 내구성에서는 떨어집니다.”

―일부 학계에서는 ‘금강송’이 정확한 명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신 대목장께서는 동의하지 않으시는 듯합니다.

“목수 일 오십 평생 처음 듣는 말입니다. 전에 전주박물관 강의 때 누가 그런 질문을 하기에 ‘금강산 관광이 뚫려서 금강송이라고 하나 봅니다’라고 대답하고 말았지만 그건 일본 학자의 발표를 인용해 쓰는 것일 뿐입니다. 강원도 금강군을 비롯해 동해안 지역의 소나무 분포지역을 나누면서 ‘금강형 소나무’라고 했다는 거죠. ‘강릉형 소나무’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20년 전에 우림목재를 차렸고, 15, 6년 전엔 강원도 정선군과 강릉 일대의 임야 42만 평을 사들였는데 거기선 언제쯤 목재가 나옵니까.

“아직 나뭇가지 하나 베지 않았습니다. 큰아들한테도 ‘네 아들 대(代)까지 베지 말고 키워라’라고 미리 유언을 남겼습니다. 거기 있는 나무도 어린 나무가 아니니까 두 세대만 지나면 괜찮을 겁니다. 사실 그 임야는 예전에 석탄공사가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입찰공고를 막 낼 때 산 건데 한 평에 1700원, 2000원 했습니다. 굉장히 싸게 산 거죠. 그렇게 산을 사들이니까 그 뒤로 벌채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산을 소개해주고 대신 벌채권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내가 산을 산 다음엔 ‘저거 한 50년 된 나무들인데 좀 더 키웁시다’라고 하니까 그 뒤로는 소개가 안 들어왔어요.(웃음)”

―신 대목장께서는 늘 홍편수-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조선목수의 적장자’를 자부하시는데 그 기문(技門)의 기법이 제대로 전승되려면 뭔가 기록으로 체계화해 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실 2002년에 ‘천년궁궐을 짓는다’는 책을 낼 때도 처음엔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작가가 신응수에 관한 얘기부터 하자고 하는 바람에…. 알기 쉽고, 쉽게 풀 수 있는 기법을 정리하려고 작년부터 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엔 완성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조선건축의 교과서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목수 기능인 시험을 보면 사개맞춤(결구 방법 중 하나)만 해도 천차만별입니다. 하지만 집을 짰을 때 당장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옳은 기법, 틀린 기법이 드러납니다. 틀린 기법은 구조상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의 공식자료를 보면 ‘도편수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기문의 계승자로 신응수와 김덕희·김중희 계열의 전흥수와 최기영이 있으며, 조원재-배희한으로 이어지는 고택영은 2004년 사망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 자료대로라면 조원재 도편수의 제자는 이광규, 배희한으로 갈려 나가는 것 아닙니까.

“(다시 언성이 높아지며) 그거 그렇지 않습니다. 조원재 시대의 목수가 누군지 다 아는데 그렇게 거짓말을 써놓으면 됩니까? 배희한 씨도 이광규 선생님과 같이 대목장으로 지정됐지만 조원재 선생님은 배희한 씨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문의 제자라니….”

신 대목장은 여러 가지로 심사가 편치 않은 듯했다.

경복궁 흥례문 복원 때도 ‘광화문 현판 소동’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30년대 사진까지 참조해가며 추녀 끝 높이를 맞췄는데 고건축을 모르는 사람들이 엉뚱한 시비를 걸어 신문에 오르내린 것이다. 그는 책에서 “목수 일을 그만 접고 싶을 만큼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이었다”고 썼다. 그때처럼 ‘목수 일을 접고 싶을 만큼’의 충격은 아니지만, 상처는 깊은 듯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대목장::

대목장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목(大木)을 말한다. 소목(小木)은 소목장이다. 대목은 기둥, 보, 도리, 공포 같은 집의 구조를 담당하고, 소목은 창이나 마루를 짠다. 대목은 건축가인 셈이다. 그 대목도 열두 분야로 나뉘는데 각 분야 대목의 우두머리를 편수(邊首)라 하고, 다시 열두 편수의 우두머리를 도편수(都邊首)라 한다. ‘도편수는 정승감이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광화문 공사는 엄밀한 의미의 도편수 체제가 아니었고 문화재청 감독 아래 각 장인들이 분야별로 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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