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 여론재판에 영향 받아 ‘석 선장에 총격’ 직접 증거 없어소말리아 경제지원 고려할 만…석 선장, 국가 차원에서 예우해야
《“적극적, 활동적으로 선박 강취 등을 한 만큼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 아라이, 무기징역!” 5월 27일 부산지법 형사합의5부(부장판사 김진석)가 무기징역을 선고했을 때 소말리아 해적 무함마드 아라이(23)는 순간 몸이 굳어졌다. 멍하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공범으로 기소돼 징역 13∼15년형을 받은 다른 해적과 달리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에게 총을 난사했다는 점 때문에 종신형을 받았다. 선고 당일 국선변호인인 권혁근 변호사(43)에게 비친 아라이의 모습이다. 나흘 뒤인 지난달 31일 권 변호사는 부산구치소를 찾아갔다. 항소 여부를 묻기 위해 30분간 아라이를 만났다. 전문 통역사 없이 간단한 소말리아어를 배운 교도관의 도움을 받았다. 실제 대화 시간은 약 10분. 이날 아라이 표정은 무기징역을 받을 때와는 달리 아주 밝았다.》
권 변호사는 “교도관에게 ‘20년이 지나면 가석방 가능성이 있다. 항소심과 대법원 판결도 남아 있다’는 말을 듣고서 아라이는 평정을 찾고 있어요. 아라이는 그동안 한국이 자신에게 대해준 모든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3일 권 변호사를 부산 연제구 거제동 법조타운에 있는 법무법인 부산 사무실에서 만났다. 법무법인 부산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설립한 곳으로 현재 문재인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표 변호사를 맡고 있다. 권 변호사는 부산지방변호사회 이주민 법률지원단장, 부산시 외국인정책협의회 운영위원을 맡는 등 다문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 2007년에는 “내국인과 동일한 근로를 제공한 외국인 산업연수생에게도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을 이끌어 냈다.
―석 선장을 살해하려 한 해적이어서 변호를 맡는 게 더욱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해적들이 한국에 압송된 뒤 여론 재판은 이미 끝이 난 상황이었다. 해적 인권이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여론은 해적들에게 중형을 선고한 상태였다. ‘비록 해적이지만 피의자 권리가 인정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주변 요청도 꽤 있었다.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국민참여재판 국선변호인으로 등록돼 있었던 터라 부산지방변호사회 추천을 거쳐 해적 변호를 맡게 됐다. 아라이가 법 지식의 기본조차 없었던 점도 힘들었다. 예전에 외국인 노동자 사건을 맡았을 때 험한 경우도 많이 겪어 큰 부담은 없었다. 사건을 맡은 것보다 언론 관심이 더 부담스러웠다.”
―일부 한국 선원은 아라이가 제일 악질이라고 했는데….
“아라이는 일관되게 무죄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부분을 잠시 제쳐두고 아라이가 한국의 인간미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전하고 싶다. 자신이 경찰과 검찰 조사, 구치소에서 받은 처우나 제도, 절차적 권리 등 모든 게 상상할 수 없던 것들이라고 했다. 수감 생활에도 전혀 불만이 없다고 했다. 자기주장을 대변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고맙게 여겼다. 체포 직전 손에 부상을 입었는데 약물과 병원 치료 때문에 좋아졌다는 점을 특히 고마워했다. 한국인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여전히 아라이는 혐의를 부인하는지….
“아라이는 모두 4가지 혐의를 부인한다. 1차 해군 작전 때 해군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과 석 선장이 시간을 벌기 위해 삼호주얼리호를 지그재그로 운항할 때 석 선장을 죽이겠다고 위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박 강취 등 나머지 두 혐의는 다른 해적과 똑같이 받고 있다. 하지만 핵심은 여전히 그에게만 적용되고 있는 석 선장 살해 미수로, 아라이는 2차 해군 작전 때 한국 선원들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과 석 선장을 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아라이가 항소를 한 이유도 그것 때문인가.
“그렇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아라이가 석 선장에게 총을 쐈다는 혐의를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라이가 석 선장을 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석 선장 본인도 해적 누군가가 자기를 불렀다는 것은 기억하지만 누가 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라이가 아니라면 누가 석 선장을 쐈다는 것인가.
“검찰 공소장에는 아라이를 석 선장 총격범으로 특정하고 있다. 이 부분을 다툴 필요가 있다. 석 선장 몸에서 분명 AK소총 탄환이 나온 것을 보면 해적 가운데 누군가가 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문제는 그게 누군인지 목격자 증언이나 검찰 기록만으로는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상 첫 해적재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왜 참여재판을 신청했나.
“해적재판을 맡기 전에 국민참여재판에 세 차례 참여한 적이 있다. 세 재판 모두 배심원 판단이 객관적이고 정확했다고 생각했다. 판단에 대한 신빙성은 전문 법관보다 높을 정도였다. 이번 재판 역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내 예상이 틀린 것 같다.”
―국민참여재판 과정에서 문제점이 있었다는 말인가.
“결과만 놓고 판단했을 때 아쉬운 점이 있다. 참여재판은 다양한 경험을 가진 배심원들이 집단적 지혜를 발휘해서 평결을 내야 한다. 이번 재판에서 배심원 구성은 제한적이었다고 생각한다(법조계에 따르면 해적재판 배심원은 주부, 무직, 학생들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5일간 재판에 매달려 증거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배심원은 이미 유죄임을 확신하는 듯한 언론보도에서 격리됐어야 하지만 모두 출퇴근하는 식으로 재판정을 오갔다. 이 과정에서 ‘나쁜 해적’이라는 선입견이 배심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줬을 것으로 판단된다. ‘싱크대 문에서 발견된 탄흔으로 볼 때 30도 각도에서 AK소총을 석 선장에게 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는 재판을 이틀 앞두고 나오는 등 증거조사 기간도 부족했다. 재판 진행은 아주 공정했다. 변호인으로서 아쉬운 점이 있어서 하는 얘기다.”
―아라이에 대한 항소심 변호도 맡을 건가.
“만약 항소심에서 변호인이 바뀐다면 새 변호인단이 모든 기록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1심 재판보다 항소심 재판은 기간이 짧다. 시간적으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나머지 해적 4명의 변호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법원에서 항소심 변호를 다시 맡긴다면 모두 맡을 것이라고 했다. 나도 맡을 계획이다. 7월에 연수가 잡혀 있다. 아라이 변호를 마무리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사무실 동료 변호사와 항소심 준비를 같이할 것이다.”
―항소심에서 어떤 점을 부각시킬 것인지….
“참여재판에서 배심원을 설득할 수 있는 전략이 부족했다. 이미 언론에 보도돼 배심원 뇌리에 깊이 박힌 사건은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신빙성을 흔드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라이의 무죄를 뒷받침할 수 있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반대 증거, 검찰이 제출한 증거의 신빙성을 탄핵할 수 있는 새 증거를 마련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항소심에서는 앞서 설명한 아라이의 핵심 혐의 두 가지에 대해 무죄를 받아내는 게 목표다.”
―사건을 맡으면서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재판을 앞두고 해적 변호인이라는 점 때문에 부담스러워 못했던 말이 있다. 소말리아 해적을 퇴치하기 위해 법원이 중형을 선고하고 본보기를 삼으려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소말리아 내부 상황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소말리아에 학교 건립 지원을 하거나 현지 외국인 고용 문제를 고민해볼 만하다. 재판 과정에서 석 선장은 요즘 보기 힘들 만큼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이런 분이 병원비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겪어서는 안 된다. 법정관리 중인 삼호해운이 지불하기 힘들다면 국가가 나서야 된다. 석 선장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분이다.”
부산=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 권혁근 변호사 약력::
―1968년 경북 예천 출생 ―부산 배정고, 부산대 법대(86학번) ―사법시험 37회 ―1998년∼ 법무법인 부산 소속 변호사 ―부산지방변호사회 이주민 법률지원단장 ―부산시 외국인정책협의회 운영위원 ―동부산아동보호센터 사례 판정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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