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갈 일도 별로 없지만 가로수길은 처음이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기업은행 신사동지점에서 주민센터까지 남북으로 700m 정도 이어진 길. 북쪽으로는 현대고등학교가 보였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저자인 건축가 이경훈 교수(국민대)에게 “그럼 본인이 직접 나선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생각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가 두 번째로 꼽은 일이 ‘가로수길에 아파트, 즉 주거기능을 넣는 작업’이었다. 첫 번째로 꼽은 일은 인도 위에 올라와 있는 자동차들을 쫓아내는 것이었고….
가로수길이 상점들만 다닥다닥 들어서 있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길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그가 보기에 그나마 서울에서 도시적 쾌적함이 살아있는 ‘거리’다.
도대체 가로수길이 뭐기에? 기자만 그런 궁금증을 가진 게 아닌 모양이다. 2007년엔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라는 책까지 나왔다. 책 소개말을 보면 1명의 매우 치밀한 카피라이터가 추진했고, 3명의 감각이 뛰어난 디자이너가 마무리했으며, 1명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총감독을 맡아 가로수길을 분석했다고 돼 있다. 가로수길의 성공을 통해 한국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가치관을 엿봤다는 것이다.
가로수길은 강남에서도 가장 임대료가 비싼 곳 중 하나라고 한다. 올해 초 기준으로만 해도 66m²(20평)짜리 상가의 권리금이 업종에 따라 4억∼4억5000만 원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비싼 권리금 속에 느림과 여유를 지배하는 인간 중심의 도시성이 있다는 것이다!
6일 이 교수와 함께 찾은 가로수길은 왕복 2차로의 차도와 그리 넓지 않은 인도, 그리고 인도를 따라 세련된 상점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거리였다. 주로 젊은 남녀들이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상점 구경도 하고, 얘기도 나누며 걷고 있었다. 외국인 부부가 유모차를 밀면서 지나가는 모습도 보였다. 청담동과도 달랐고 홍익대 앞과도 또 달랐다.
무엇보다 밝았다. 거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이 교수에게 물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가로수길만은 예외라는 겁니까.
“서울에서 ‘걷고 싶은 거리’로 지정된 곳이 아마 100군데는 될 겁니다. 남산 소파길도 그중 하나지만 걷고 싶은 거리라기보다 산으로 난 길, 가끔 걸어보고 싶은 ‘길’일 뿐입니다. 언젠가 한 번 가봤는데 노부부와 버스에서 잘못 내린 듯한 등산객 세 사람, 그리고 젊은 연인 한 쌍뿐이었습니다. 다른 곳도 대동소이합니다. 길과 거리를 구분하긴 쉽지 않지만 길은 路(road), 그러니까 한 점과 다른 점을 연결하는 이동통로입니다. 하지만 거리는 街(street), 다시 말해 도시라는 삶의 공간의 일부입니다. 사진이나 영화 속에서 노천카페의 낭만은 모두 ‘거리’가 낳은 것입니다. 도시가 삭막하다는 것은 곧 거리가 삭막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로수길은 다릅니다. 명칭은 ‘길’이지만 서울에서 보기 드문 ‘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얘기가 원점으로 돌아가는데,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2000년대 뉴욕이 로망의 도시로 다시 태어난 데에는 ‘섹스 앤드 더 시티’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6년이나 방영됐는데 사실 그 드라마는 ‘섹스’보다 ‘시티’, 그러니까 흥미로운 뉴욕의 라이프스타일에 비중을 두고 전개됐고 도시에서만 가능한 삶과 스타일을 포착했습니다. 사랑 우정 이별 같은 것도 모두 거리에서 이뤄집니다. 주인공 캐리의 광적인 구두 사랑은 도시성에 대한 집착이자 애정이고, 걷는 일이야말로 도시생활의 필수요소임을 보여줍니다. ‘걷기의 역사’를 쓴 레베카 솔닛은 걷기야말로 도시라는 공간을 점유하고 즐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걷기는 고행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그나마 가로수길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이 교수의 이력을 잠깐 언급하는 게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1963년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서울 남산 부근에서 살았으니까 ‘서울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국민대를 졸업하고 1987년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인스티튜트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미국건축가협회(AIA)의 정회원이 됐다. 1997년, 10년간의 뉴요커 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으나 외환위기로 일거리를 찾기 어려워지자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2년여를 보냈다.
―그럼 무엇이 가로수길에 도시성을 부여하고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든 겁니까.
“가로수길에는 서울 대부분의 ‘걷고 싶은 길’에 있는 두 가지가 없습니다. 우선 공원이 없습니다. 그 대신 건물과 상점이 빼곡합니다. 둘째, 인도에 올라와 있는 자동차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가뿐한 걸음걸이가 거리를 메웁니다. 바로 이 ‘없는 두 가지’가 가로수길을 도시의 거리로 거듭 태어나게 만든 요인입니다. 가로수길의 성공은 경제적 가치로도 환산됩니다. 3.3m²당 가격이 강남 최고 수준입니다. 오죽하면 길 옆 골목으로 ‘세로수길’이 생겨났겠습니까.”
―결국 상점거리로 성공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진정 도시를 도시답게, 그리고 걷게 만드는 것은 상점입니다. 상점은 거리의 활력일 뿐 아니라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자 보안등입니다. 거리의 청결함과 쾌적함을 감시하는 파수꾼입니다. 보행자들에게 볼거리와 잔재미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거대한 미술관이기도 합니다. 도시에서는 계절의 변화도 상점의 쇼윈도에서 느끼는 겁니다. 원래 도시는 상업적 공간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이 도시성을 갖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까닭은 ‘상업적인 것은 안 된다’는 비현실적 엄숙주의 때문입니다. 사실 서울만큼 상업적인 도시도 없는데 말입니다. 위선이죠.”
―인도 위의 불법주차가 걷기를 방해하고, 그래서 거리를 망친다는 얘기는 알겠는데 공원을 ‘도시성의 공적’쯤으로 지적한 건 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서울을 매력 없고 불편하고 삭막하다고 느끼게 하는 데에는 역설적으로 ‘쾌적함’과 ‘자연’이 큰 역할을 합니다. 도시적 쾌적함보다 자연과의 접촉을 유일한 쾌적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죠. 한국인에게 자연은 이데올로기나 다름없습니다. 요즘은 친환경도 ‘친자연’으로 등치되고 있고…. 그래서 끊임없이 공원과 녹지를 늘리자고 합니다. 그렇게 도심의 금싸라기땅이 공원으로 변해가지만 대부분은 쓰임새 없는 공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시는 태생적으로 인공입니다. 도시적 쾌적함과 전원의 쾌적함은 다릅니다. 그런데 도심재개발만 하면 공원과 녹지를 만들자고 합니다. 서울의 녹지율, 공원면적 비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공원의 도시라고 하는 런던의 두 배 이상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택정책, 도시정책엔 일종의 ‘녹지 강박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강박증입니다. 을지로5가의 훈련원공원을 한 번 가보십시오. 건물을 헐어내고 조성했는데 공터에 화초와 나무만 심어져 있을 뿐 정말 참혹합니다. 100개의 상점은 수시로 사람을 이끌고 걷게 하는 1000개의 매력을 가졌지만 공원은 밝을 때만, 그것도 아침에 운동하는 정도로밖에 사람을 끌어들이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방음벽 이야기를 하면서 서울을 ‘게토’에 비유한 것이 아팠습니다.
“그것 또한 자연이데올로기에 닿아 있습니다. 아파트와 학교, 거리의 방음벽은 서울에만 있는 장벽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진국에서도 방음벽을 설치한다고 하지만 그건 도심이 아닌 고속도로 주변 교외에서나 벌어지는 일입니다. 방음벽은 흉물스러운 모습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방음벽은 소음뿐 아니라 바람도, 사람도, 풍경도 막아버립니다. 풍경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공공재입니다. 도시의 풍경은 자연과 달리 시민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아파트 소음을 줄인다는 사적인 쾌적함을 위해 그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을 도시 전체에 지우는 것은 천민자본주의적 행태고 반도시적 징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핑계는 소음이지만 실은 아파트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이겠죠.
“소음 민원이 커지면 시에서 방음벽을 설치해주는데 그건 사적인 재산 증식을 예산으로 도와주는 꼴입니다. 시끄러운 땅을 싸게 사놓고 조용한 곳으로 바꿔달라는 거죠.”
―아파트도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징표로 꼽았죠? 한국 도시의 최대 불행이라고까지 했던데….
“사실 책을 낼 때 ‘아파트는 도시의 미래가 아니다’라는 장(章)이 가장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문 방송에서 그 대목을 다루지 않는 걸 보고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책을 기획할 때도 주변에서 ‘아파트는 빼지…’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왜 불행이고, 왜 미래가 아닙니까?
“다 알다시피 한국의 아파트는 주거라기보다는 재산 증식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 취향보다는 시장의 요구에 따르는 ‘타자의 건축’이죠. 그런데 시장이라는 괴물은 아파트에 도시에서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바랍니다. 모든 세대가 남향일 것을 요구하고, 울창한 자연에 둘러싸여 있기를 원하며, 방음벽으로 도로와 차단돼 고요해야 한다고 주문합니다. 도시의 문화적 경제적 혜택은 고스란히 누리면서도 번잡함은 멀리하겠다는 이중적 태도가 주거와 도시를 모두 망칩니다. 인구가 감소하고 수명이 다하면 서구 선진국들이 그랬던 것처럼 슬럼화의 길을 걷게 될 게 분명합니다.”
―우리 아파트의 인테리어에 혀를 내둘렀던데….
“아파트 내부를 그렇게 화려하게 하는 경우는 못 봤습니다. 가정집 안에 대리석을 붙이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아파트 내부는 대리석과 할로겐으로 호텔을 능가하게 꾸며놨지만 문을 나서면 페인트칠이 벗겨진 복도와 알전구를 만나게 됩니다. 아파트단지 내부의 조경은 깔끔하지만 거리는 방치돼 있습니다. 도시의 풍경과 생명이 오히려 이러한 중간영역, 공유공간의 지리에서 가름된다는 걸 생각하면 슬픈 일입니다.”
―중간영역, 공유공간?
“우리는 충(忠)과 효(孝), 그러니까 국가와 부모에 대한 도리를 강조합니다. 옳지 않다고 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것이 거대한 공동체인 국가와 매우 사적이고 미세한 공동체인 가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간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이웃과 낯선 사람에 대한 예절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도시에 비유하면 공공공간과 사적인 개인공간이 중요하지만 그 사이의 ‘공유공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가 강조하는 공유공간이 바로 도시의 거리고 이웃이었다.
그는 2, 3층 정도인 가로수길 건물 3∼5층에 아파트가 들어선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했다. “가로수길의 거리는 남향이지만 어느 건물도 남향이 아닙니다. 거리는 하루 종일 밝은 빛을 받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물론 그렇다고 건물에 햇볕이 안 드는 것도 아닙니다. 상쾌한 아침 햇살과 석양은 여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집이 비어 있는 낮시간 동안 거리에 따스한 햇볕을 양보하는 것이죠. 상상해 보십시오. 현관을 나서면 밝고 아름다운 거리가 있고, 도시의 북적거림이 펼쳐져 있습니다. 식당이 있고, 커피숍이 있고, 서점과 빵집이 있습니다. 그 모든 가게의 주인과 단골들이 당신의 이웃이자 친구입니다. 타워팰리스보다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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