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58)가 1976년 미국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충남 예산중에서 활동하던 시절. 1학년 학생 가운데 ‘아주 영리하고 근면하며 책임감 있는 학생’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 학생은 학급 반장도 맡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항상 꼿꼿이 앉아 수업에 집중했다.
그 학생은 영어교사로 온 열 살 연상의 ‘스티븐스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키가 큰 금발의 외국인 선생님은 ‘별나라에서 온 공주님’이었다. 선생님은 항상 웃었고 상냥했다. 또 매력적이었다. 학생은 선생님이 퇴근할 때 하숙집으로 모셔 드렸다. 구멍 난 양말 사이로 삐죽 나온 자신의 발가락을 보며 유쾌하게 웃던 선생님이 정말 좋았다.
선생님은 그해 여름 충남 부여의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 학생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 선생님을 꼭 다시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35년 뒤 그 학생은 강원도 비무장지대(DMZ) 전방에서 근무하는 육군 대령으로 성장했다. 2004년 이라크 파병 때는 가장 먼저 현지에 도착한 공수부대 부대장이었다. 육군 3사단 (백골부대) 참모장인 이철원 대령(48)이다.
2008년 스티븐스 대사가 한국에 부임했을 때부터 이 대령은 대사에게 연락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역 장교로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주저했다. 그렇게 3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 대령은 얼마 전 스티븐스 대사가 이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겠나’ 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 스티븐스 대사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스티븐스 대사는 흔쾌히 이 대령을 대사관으로 초청했다. 이 대령은 짝사랑했던 선생님을 만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8일 옛 스승과 제자는 3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옛 제자는 스승에게 35년 전 짝사랑했던 사실을 처음 고백했다. 옛 스승은 수줍게 웃었다. 제자에게 “왜 이제야 왔느냐”고 여러 번 말했다.
이 대령은 28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선생님은 자신이 키우는 삽살개 두 마리 중 하나의 이름이 ‘무심(無心)’이라며 인연과 무심이란 말을 미국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렵다고도 했다”고 전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27일 자신의 블로그에 이 대령과의 만남을 소개하며 “한국에 부임한 지 3년이 돼가면서 예전에 알았던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인생은 놀라움으로 가득 찬 것 같다”며 기뻐했다.
그는 “이 대령은 육사를 졸업한 뒤 필리핀 동티모르 이라크에서 근무했고 미국 텍사스와 하와이에서 열린 한미 공동훈련에도 참가했다”며 “이 대령의 커리어(이력)는 바로 오늘 이 나라를 변화시킨 ‘글로벌 코리아’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의 인연이 영원하다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글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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