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노부부의 ‘위대한 유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2일 03시 00분


다섯 남매 학비 빼고 평생 아껴 모은 10억원
홍용희-한재순씨 명동성당에 기부하고 떠나

전 재산을 기부하고 간 홍용희(오른쪽) 한재순 씨 부부의 생전 모습. 서울대교구 제공
전 재산을 기부하고 간 홍용희(오른쪽) 한재순 씨 부부의 생전 모습. 서울대교구 제공
평생을 모은 돈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하고 함께 세상을 떠난 노부부 이야기가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평생 야채와 쌀장사를 하며 생계를 꾸려온 한재순(세례명 미카엘라·83·여) 씨는 지난해 12월 둘째 딸과 함께 서울 명동성당 정진석 추기경 집무실을 찾았다. 한 씨는 이 자리에서 “죽기 전에 꼭 한 번 좋은 일을 하고 떠나고 싶다. 옹기장학회를 비롯해 좋은 일에 써 달라”며 1억 원짜리 수표 9장이 든 흰 봉투를 정 추기경에게 전달했다. 옹기장학회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설립한 장학재단이다. 한 씨는 며칠 후 한 수도원 내 영성센터 건립기금으로 1억 원을 더 기부했다.

이 10억 원은 한 씨가 남편 홍용희(세례명 비오·82) 씨와 함께 평생 장사를 하며 모은 전 재산. 기부 후 부부의 통장에는 280만 원만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의 둘째 딸인 홍모 씨는 “부모님은 우리 다섯 남매의 학비를 빼고는 모든 것을 악착같이 아끼며 살아오셨다”며 “더운 날에 선풍기 한 번 덜 켜고, 먹고 싶은 반찬 안 먹고 모은 돈임을 잘 알기에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는 파킨슨병을 앓던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시고 난 뒤 두 분이 함께 해온 일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동안 번 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며 “목표로 삼았던 10억 원을 모두 기부하고 나오던 길에 어머니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며 정말 홀가분해하셨다”고 말했다. 홍 씨는 기부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자신의 이름도 끝내 밝히지 않았다.

노부부의 아름다운 선행은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성당에서 치러진 부부의 장례미사에 정 추기경이 추도사를 보내면서 알려졌다. 남편 홍 씨는 지난달 26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8일 부인 한 씨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망했다.

정 추기경은 추도사에서 “고 홍용희 비오 형제님, 한재순 미카엘라 자매님이 평생 근검절약하며 모은 재산을 좋은 일에 써달라며 기부하고 떠나셨습니다. 저는 이 돈이 단순한 재물이 아니라 부부 평생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애도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