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가족 힘들게 살았지만 바라던 한국 국적 갖게돼 뿌듯”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2일 03시 00분


천숙자 씨 등 13명에 국적 증서

1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중국 국적으로 살아온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한국 국적을 수여하는 행사가 열렸다. 앞줄 가운데 증서를 들고 웃고 있는 사람이 항일투사였던 고 이경재 선생의 외손녀인 천숙자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11일 오후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중국 국적으로 살아온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한국 국적을 수여하는 행사가 열렸다. 앞줄 가운데 증서를 들고 웃고 있는 사람이 항일투사였던 고 이경재 선생의 외손녀인 천숙자 씨.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그렇게 바라던 한국 국적을 갖게 됐네요. 그런데 둘째 아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옵니다.”

11일 독립유공자 후손 자격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한 천숙자 씨(76·여)는 옆에 앉은 둘째 아들 이길호 씨(38)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 씨도 어머니 천 씨와 함께 이날 국적을 회복했지만 한국말을 하는 천 씨와 달리 인터뷰 내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기 때문이다.

천 씨는 1919년 이후 중국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에서 항일투쟁조직 의군단 참모 겸 비서를 담당하면서 항일 활동을 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군에 피살된 독립유공자 고 이경재 선생의 외손녀다. 그러나 지난해 고혈압으로 몸져누운 남동생이 국적 회복을 하기 전까진 외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라는 점에 대해 가족 누구도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천 씨는 “중국에서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사람들을 열사라고 부르는데 국적 회복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외할아버지께서 열사라는 사실이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살림살이는 힘들었다. 1991년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매일 함께 공장에 나가서 선반 등의 공작기계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했다. 그때까지 월급은 38위안(약 6424원). 4남매 중 맏이인 천 씨는 “중국에서도 생계가 막막해 국적 취득 신청을 했다”며 “1961년엔 첫째 남동생이 돈을 벌겠다며 북한에 밀입국했지만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후손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점을 확인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한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이날 법무부는 천 씨를 포함해 모두 13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국적 증서를 수여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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