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혁 전문기자의 세상이야기]‘무이파’로 큰 피해 본 최병국 가거도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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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15일 03시 00분


“태풍 한방에 1300억 들인 방파제가 무너지다니…주민들 억장도 무너져”

가거도의 생명줄인 주 방파제에 올라 피해현장을 보고 있는 최병국 이장. 제9호 태풍 무이파는 6일 오후 8시부터 8일 오전 2시까지 30시간가량 가거도를 때렸다. 가거도=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가거도의 생명줄인 주 방파제에 올라 피해현장을 보고 있는 최병국 이장. 제9호 태풍 무이파는 6일 오후 8시부터 8일 오전 2시까지 30시간가량 가거도를 때렸다. 가거도=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대통령 선거도 여러 번 취재했고, 사회부 기자 시절엔 대형 노사분규 현장도 숱하게 다녔지만 태풍 ‘무이파’와 가거도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30년 동안 1300억 원을 들인 방파제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정부가 피해보상 및 방파제 보수공사에 500억 원쯤 소요될 것으로 추산한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주민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차라리 대한민국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고 중국으로 붙자”며 분노하고 있고…. 집에 돌아와 이런 얘기를 들려주자 아내는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었다. 아내뿐이랴. 아마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더 막막하다.

10일 오후 KTX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 하룻밤을 잔 뒤 이튿날 오전 8시 10분에 출항하는 가거도(可居島)행 쾌속선을 탔다. 태풍이 물러간 뒤 처음 출발하는 정기노선이었다. 쾌속선으로만 4시간 반. 배가 하루에 한 번밖에 없으니 섬에서 또 하룻밤을 자야 한다. KTX와 30노트(시속 55km가량)의 쾌속선을 타고도 서울에서 2박 3일이나 잡아야 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대한민국의 서남단 가거도였다.

도착한 날 저녁, 흑산면 가거출장소 바로 옆 가거비치 식당에 주민 7, 8명이 모였다. 한국의 섬을 돌아보고 있다는 뉴질랜드 출신 여행작가 로저 씨도 합류했다. 태풍 이야기는 가거도의 역사로 옮아갔다. 로저 씨가 “뉴질랜드의 백인 역사는 200년, 그전엔 마오리족이 살았으나 500년 전엔 그마저도 없었다”고 하자 누군가가 “가거도는 600년 전부터 선조들이 살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거도엔 대략 1580년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얘기인 듯했다. 태풍으로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600년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외침을 들으면서 ‘실효적 지배’라는 말을 떠올렸다.

독도 얘기만 나오면 우리는 ‘실효적 지배’를 외친다. 하지만 실효적 지배를 행정적, 군사적 관할권으로만 생각한다면 그건 단견이고 본말의 전도다. 진짜 실효적 지배는 ‘국민이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독도에 주민숙소를 짓고, 다시 30억 원을 들여 2층짜리 숙소를 4층으로 증축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이 수면 위로 16cm가량 드러나 있는, 면적으로는 싱글 침대만 한 크기의 수중암초 주위에 테트라포드를 쌓고 시멘트를 부어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중국 대만과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유권 분쟁을 종식시키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일본은 문제의 그 ‘섬’에 해수침식방지시설비 300억 엔을 포함해 1988년부터 2005년까지 1조 원이 넘는 돈을 퍼부었다).

주민들이 ‘가거도 600년사(史)’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비록 멸치 잡고, 미역 따며 지내온 세월이지만 ‘실효적으로’ 대한민국의 서남단 영토를 지켜왔다는 자부심이었다. 그 자부심이 지금 “차라리 중국에 붙는 게 낫겠다”는 분노와 소외감으로 변하고 있다.

5대째 가거도에 살고 있고 그 자신도 평생 가거도를 떠나 본 적이 없는 최병국 이장(65)은 그래도 마을 대표라 원색적인 표현은 삼갔다. 그는 “내가 지금 우리 나이로 예순일곱인데 매년 태풍을 겪어도 이런 것은 보지 못했다. 항만공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엊그제 마을 주민 회의 때는 ‘이민’ 얘기까지 나왔다”고 했다.

―그래도 ‘중국에 넘기자’는 얘기는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예전엔 여기가 전부 자갈밭이었습니다. 정말 예뻤죠. 그런데 1979년인가 동중국해가 황금어장으로 떠오르자 박정희 대통령이 어업전진기지를 만들라고 해서 방파제 공사가 시작됐습니다. 국가가 방파제를 만들어준다고 해서 주민들도 좋아했습니다. 생명 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니까요. 태풍과 파도를 피해 높은 지대에 살던 사람들도 방파제만 믿고 바닷가로 내려왔습니다. 시멘트로 식당 여관 같은 건물들도 지었습니다. 그런데 공사는 무려 29년이나 계속됐습니다. 어느 해는 1억 원, 어느 해는 몇천만 원, 어느 해는 10억 원…. 그런 식으로 공사가 이어졌습니다. 그 세월 동안 발파작업으로 집이 흔들리고, 돌가루가 날아다녀도 말 한마디 안 했는데 준공한 지 3년 만에 모두 무너져 내린 겁니다.”

―태풍이란 건 불가항력적인 것이고, 또 가거도는 늘 태풍과 함께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좀 전에 말했지만 30년 공사가 하루아침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배에서 내리실 때 부두 한복판에 떨어져 있는 테트라포드 보시지 않았습니까. 64t짜리 테트라포드가 폭 15.2m, 높이 8m의 방파제를 넘어 파도에 날아온 겁니다. 방송 자막을 보니 방파제 보수비로 500억 원을 추산하고 있다던데 그런 걸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마음 놓고 정착해서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연평도는 사건이 나니까 국무총리도 가고 집도 새로 짓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오랜 세월 서해 최남단 영토를 지켜왔습니다.”

부두 한복판의 테트라포드는 충격적이었다. 가거도 방파제를 쌓을 때 쓴 테트라포드는 64t. 어른 1000명의 무게와 맞먹는다. 아직 정확한 피해 실태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000개 이상의 테트라포드가 유실됐다는 게 행정당국의 어림짐작이다. 방파제 공사에 투입된 테트라포드의 절반가량이다. 흑산면 가거도출장소가 찍은 동영상을 보니 파도는 높이 25m의 등대를 훌쩍 뛰어넘어 항구 안쪽을 때리고 있었다. 그것도 사흘 동안….

―가거도라는 이름은 ‘살 만한 섬’이라는 뜻인데….

“조상들이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태풍 무이파가 와서 이 지경이 되고 보니까 이번을 계기로 항만공사가 제대로 안 되면 이민 간다는 얘기까지 나온 겁니다. 우리 가거도는 ‘민원’ 같은 것을 안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잘 안 되면 상당히 공격적인 일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야기 도중 마을 상수도에 문제가 생겼다는 긴급연락이 왔다. 1996년에 이어 두 번째 마을 대표를 맡고 있는 최 이장은 섬 안의 유일한 ‘상수도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장이 자리를 뜬 사이 태풍 때 육상에 올려놓은 어선들을 둘러보다 배를 손보고 있던 임진욱 씨(47)를 만났다. 그는 2000년 8월 태풍 ‘프라피룬’이 덮쳤을 당시 마을 청년회장이었다.

―마을이 어디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는 것 같다.

“가거도의 태풍 피해를 이슈화하는 것도 좋지만 그때뿐입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 방파제가 원래 주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동중국해 어장을 겨냥하고 만든 국책사업이었다는 겁니다. 가거도 앞바다는 조기가 올라오는 길목이었거든요. 하지만 이번 태풍으로 실패한 사업, 실패한 공사임이 드러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국가적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인데도 정부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관심이 없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5명이서 소주를 마시려면 회 2kg은 떠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가 하는 얘기는 손바닥만 한 노래미 한 마리 놓고 마시라는 겁니다. 그러니 ‘요즘 중국이 이 쪽에 관심이 많으니 차라리 중국에 붙어버리자’는 얘기가 안 나오겠습니까? 올해 안에 태풍 1, 2개가 더 올 텐데 소형 태풍이라도 몇 시간만 때리면 파도가 항구 안으로 밀고 들어올 겁니다.”

임 씨와 대화를 나누다 고흥산 씨(75) 얘기를 전해 들었다. 2000년의 태풍 프라피룬도 이번 무이파처럼 중국으로 향하는 줄 알고 있다가 큰 피해를 남겼는데, 당시 고 씨가 태풍 속에서 배를 지켜낸 스토리가 ‘한국판 노인과 바다’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임 씨는 “그때 동아일보에 크게 났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가거도에선 태풍이 오면 모두 인근 흑산도나 멀리 목포로 피항한다. 흑산도라고 해도 어선으로 4시간이 걸리는 곳이고, 한번 피항을 가면 일주일, 열흘에서 길게는 보름씩 걸리기 때문에 비용만 해도 몇백만 원씩 들어간다. 게다가 프라피룬 당시 기상예보는 태풍이 중국 상하이 쪽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고 씨를 비롯한 상당수 어선들은 가거도에 그냥 남았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고 씨는 3.8t짜리 배에 올랐다. 사투(死鬪)가 시작됐다. 30t이 넘는 외지(外地) 배들도 모두 나자빠졌다. 파도가 배의 옆구리를 치면 그걸로 끝이었다. 뱃머리를 정확하게 파도가 오는 방향에 맞춰야 했다. 320마력짜리 엔진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태풍에 맞섰다. 파도에 정면으로 부딪힐 때마다 배는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30초 동안 하늘로 솟구쳤다가 다시 수직으로 떨어졌다. 육상에서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 사이에선 그럴 때마다 “아∼” 하는 체념의 소리와 “와∼” 하는 탄성이 교차됐다. 그러기를 6시간, 바람이 잦아들었고 그는 배를 구해냈다.

고 씨 집을 찾았다.

―그때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그때는 이번보다 작았다. 이번 게 제일 큰 거다. 이번에는 흑산도에 가 있었다. 울릉도가 낙도(落島)라지만 대한민국에서 파도가 제일 어신(거센) 데는 가거도다. 태풍이 제주도로 가다가도 이쪽으로 오고, 중국으로 가다가도 이쪽으로 틀고….”

―그때 죽는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까.

“뛰어내려도 죽는 건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집 식구는 새마을창고 앞에서 보고 있었는데 파도가 덮쳐 배가 안 보이면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더라.”

―섬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까.

“1년에 한 번은 각오를 해야 하고, 하도 태풍을 겪어서 그런 생각은 안 한다. 1959년 (역사상 최악이라는) 태풍 ‘사라’ 때는 방파제가 없었다. 그때는 170가구 정도 있었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 배를 육상으로 끌어올렸다. 선주들이 가져다놓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배를 파도가 들이치지 않는 곳으로 올렸다. 정작 그때는 배 피해가 없었다. 그런데 방파제를 만든다고 500m나 되는 가거도의 자갈해변을 파내고 모두 시멘트로 덮어버리더니 공사한 지 3년 만에 다 날아가 버리더라.”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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