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박정희 대통령 마지막 경호원’ 박상범 前경호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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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24일 03시 00분


1978년 3월 경북순시후 朴대통령이 나만 불렀다…“내가 18년 됐지? 20년 되는 해 물러나야겠다”

《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아 숨진 1974년 8월 15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을 향해 권총을 빼들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몸으로 막아섰던 사람. 5년 뒤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측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으나 현장에 있던 청와대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 청와대 경호실의 산증인이자 불사조로 불리는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그날 그 현장’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때 박상범 당시 청와대 경호원(가운데)이 박 대통령이 서 있던 연설대 앞으로 뛰어나가 정면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동아일보DB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때 박상범 당시 청와대 경호원(가운데)이 박 대통령이 서 있던 연설대 앞으로 뛰어나가 정면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동아일보DB
1979년 10월 26일 금요일 오후 7시 41분 궁정동 안가.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놈(차지철)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너 이 새끼 차지철, 죽일 놈!”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을 쏘았다.

“무슨 짓이야! 김 부장!” 박정희 대통령이 호통을 쳤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김재규는 박 대통령에게 총을 쐈다.

그 순간 박선호(중정 의전과장·1980년 5월 24일 교수형)는 대기실에 있던 안재송(경호부처장)과 정인형(경호처장)을 죽였고, 박흥주(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1980년 3월 6일 총살형)는 주방에 있던 김용섭(경호관) 박상범(수행계장)을 쏘았다. 그날 그 현장에서 박 전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상범 수행계장.

세상 사람들은 비극적인 현대사의 현장에 있었던 그로부터 ‘그날 그때’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그는 입을 닫아 왔다. 훗날 청와대 경호실장을 거쳐 보훈처 장관까지 지내며 주요 공직을 거쳤지만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 왔다. 6년 전 한 월간지에 인터뷰가 실렸지만 10·26과 관련한 민감한 사안들은 비켜갔다.

1975년 남대문상가 돌아보는 박정희 1975년 서울 남대문 지하상가를 돌아보며 서민들과 이야기 나누는 박정희 전 대통령. 오른쪽부터 장녀 근혜 씨(전 한나라당 대표),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 차녀 근령 씨. 동그라미 안이 근접경호를 하고 있는 박상범 당시 수행계장이다. 박상범 씨 제공
1975년 남대문상가 돌아보는 박정희 1975년 서울 남대문 지하상가를 돌아보며 서민들과 이야기 나누는 박정희 전 대통령. 오른쪽부터 장녀 근혜 씨(전 한나라당 대표),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 차녀 근령 씨. 동그라미 안이 근접경호를 하고 있는 박상범 당시 수행계장이다. 박상범 씨 제공
―왜 침묵했습니까.

“각하와 육영수 여사를 지키지 못한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게다가 경호를 통해 얻은 내부 정보는 발설하지 않는 게 직업윤리입니다.”

그가 ‘그날’을 겪은 충격에 오래 괴로워했음이 느껴지는 말과 표정이었다.

올해 10·26에 맞춰 그를 인터뷰하기 위해 기자는 6개월가량을 설득해 왔다. “대선정국인 내년에는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특히 박근혜 전 대표가 유력한 차기 대선후보로 등장한 상황에서 10·26 증언은 올해가 객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마지막 해”라는 게 설득의 변이었다. 그가 인터뷰 결심을 전해 온 것은 이달 18일이었다.

이튿날 서울에서 만난 그는 인상은 부드러웠지만 무인(武人)의 풍모가 강하게 느껴졌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가부좌 자세가 세 시간의 대화 동안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사진촬영 때를 제외하고는 웃옷도 벗지 않았다. 오랜 신체단련으로 군살 하나 없는 몸은 예순여덟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꼭 32년 전이지요.

“네…. 삽교천 방조제 행사를 마치고 (박 대통령이) 점심 식사 후 헬기로 (청와대로) 들어오셨어요. 오늘은 일이 끝나나 보다 했는데 저녁 때 갑자기 출타하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와 수행과장, 경호원 한 명이 차 한 대로 움직이고 경호처장님은 각하 차에 동승해 2대가 움직였습니다.”

10·26 유일 생존자 10·26 당시 궁정동 안가 현장에서 청와대 관계자 중 유일하게 총탄을 맞고도 살아남은 박상범 청와대 전 경호실장.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10·26 유일 생존자 10·26 당시 궁정동 안가 현장에서 청와대 관계자 중 유일하게 총탄을 맞고도 살아남은 박상범 청와대 전 경호실장.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궁정동 안가와의) 거리는 얼마나 되죠.

“청와대 바로 옆이죠. 보통 두 달에 한 번꼴로 가셨죠. 비공개로 사람을 만날 때 활용하던 곳입니다.”

―뭐 이상한 느낌은 없으셨어요.

“없었어요. 경호원들은 안방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전혀 모릅니다. 안가 주변을 이리저리 경계하다 식전(食前)이라 시장기를 없애려고 주방으로 들어섰죠. 쭈그리고 앉아 한술 뜨려는 순간 갑자기 ‘탁’ 하고 집 전체가 정전이 됐습니다. 곧이어 바깥 현관 쪽에서 ‘탕 탕 탕’ 집중 사격 소리와 함께 후다닥 사람이 쳐들어 왔습니다.”

―총을 맞았나요.

“네 발을 맞았습니다. 총을 뽑으며 벌떡 일어난 상태에서 한 발은 오른쪽 척추 옆을 관통하고 다른 한 발은 벨트에 찬 실탄에 맞아 튕겨 나가고. 두 발은 웃옷 좌우를 아슬아슬하게 뚫고 나갔죠.”

박 전 실장은 뒤로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혀 의식을 완전히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 보니 국군수도통합병원 병실이었다. 피를 흘리며 10시간가량 방치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으니 말 그대로 구사일생이었다.

“27일 아침이었습니다. 제 병실은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제일 먼저 면회 온 사람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괜찮냐’ ‘괜찮습니다’ 간단한 대화가 전부였습니다. 며칠 후 병원장으로부터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들었죠.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있다가…경호상의 실수는 주로 그런 때 일어나는데…손도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습니다.”

마지막 말에는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 경호를 못 했다는 자책과 죄의식이 실려 있었다.

―당시 권력 내부 사정을 전혀 몰랐나요.

“저는 경호를 하는 사람이지 정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미 박 대통령 서거 후 모든 것을 포기한 상황이었습니다. 삶을 접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멍하니 살았으니까요. 병실에 누워 대통령 영구차 나가는 것을 TV로 보면서 괴로웠습니다. 그런 와중에 12·12가 났고 최규하 대통령이 취임했지만 경호실은 모두 해체된 상태였습니다. 저도 사표를 냈고요. 의전 수석이 어느 날 ‘경호실을 재건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전화를 걸어와 성치 않은 몸으로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 10년 모셨죠. 박 전 대통령은 어떤 분이셨나요.

“허허벌판에 포항제철이 들어서고 고속도로가 생기는 것을 제 눈으로 봤습니다. 헬기로 전국을 다니며 땅을 한참 둘러보시고는 혼잣말처럼 ‘됐다, 여기다’ 이런 적이 많았습니다.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생각하며 살던 분이었습니다. 업무적으로는 굉장히 철저한 분이어서 다들 어려워했죠. 상대를 쏘아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은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박 전 실장은 “하지만 참 정이 많은 분이었다”고 했다.

“74년 7월에 큰 장마가 있었어요. 신도림동 뚝방 근처 18평짜리 개인주택에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지붕까지 잠겼습니다. 2박 3일 휴가를 내고 달려갔죠. 다음 날 직원들이 라면하고 구호품을 들고 왔습니다. ‘각하께서 너를 찾으셔서 보고를 드렸더니 빨리 가봐라’고 해서 왔다는 겁니다. 저 같은 졸병들한테까지 마음을 써주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한 달 뒤에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이 터졌죠.”

―문세광을 향해 정조준하는 모습이 당시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습니다.

“전 커튼 뒤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땅’ 하는 소리가 들려 바로 튀어 나갔지요. 문세광이 무대 쪽으로 총을 쏘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각하께서 연설대 밑으로 피하는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간 저에게 ‘우리 내자는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공개된 사진 중에 제가 정조준 상태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사진이 있는데 각하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여사가 계신 쪽을 돌아본 거죠. 여사는 이미 총에 맞아 고개를 왼쪽으로 떨군 상태였습니다. 문세광은 현장에서 검거됐습니다. 모든 일이 불과 3, 4초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육 여사 사후 박 대통령께서 심적으로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많이 방황하셨던 것 같아요. 약주도 좀 많이 하시고. 몇 번 취하셨을 때는 ‘박 군아, 업어라’ 하셔서 업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가벼웠나요.

“그럼요. 체구가 워낙 작은 분이셔서….”

―당시 영부인을 큰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행했지요.

“가족 경호팀이 따로 있어서 공식행사 말고는 직접 접촉한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박 전 대표 행동을 보면 박 전 대통령 모습이 많이 겹쳐집니다. 뭐든지 기록하는 거나 어떤 일이 터져도 의연한 거나 아버지를 똑 닮았다 여겨집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이 의연함을 보여준 또 다른 기억을 꺼냈다.

“76년 어느 날 주말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에 서울대 사범대학 정문 앞을 지나는데 학생들이 막 돌을 던지는 거예요. 데모가 심했던 때였거든요. 각하께서 갑자기 차를 세우시더니 캠퍼스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게 아닙니까. 학생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별일은 없었지만 경호하는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죠…궁정동에서 총을 맞고 숨이 끊어지는 상황에서도 ‘나는 괜찮네’ 하셨던 분이에요. 그게 마지막 말이었죠. 결국 유언이 되어버린 그 말 한마디엔 생사를 초월해 죽음에 담담한 마음, 최후의 순간에도 남을 먼저 걱정했던 마음이 담겼다고 봅니다. 아무나 못 하는 거거든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가까이서 보면 허물이나 약점이 보이는 법인데요.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셨던 분이었어요. 늘 깔끔하고 흐트러지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허점을 안 보이려고 무척 노력하셨죠. 지방 출장 때 호텔에서 주무실 때도 빨랫감을 스스로 정리해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 ‘박정희’라는 이름표까지 달아 문 앞에 딱 내놓는 분이었습니다. 70년대에 물 절약하자는 운동이 있었잖아요. 경호팀이 수시로 거주하시는 곳 이곳저곳 점검을 하는데 어느 날 양변기 물통에 벽돌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누가 흉기를 넣은 게 아닌가 잔뜩 긴장했죠. 알고 보니 물을 아끼려고 직접 넣어 놓으신 거였어요.”

―가끔 폭음도 하셨다면서요.

“약주를 즐기긴 하셨어도 인사불성으로 취하신 적은 없습니다.”

박 전 실장은 이 대목에서 10·26 한 해 전인 1978년 3월 박 대통령과 나눴던 개인적 대화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경상북도 순시를 하고 구미 관광호텔에 하루 묵으신 다음 날이었어요. 여느 날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셨어요. 대통령도 저희 수행원들도 모두 쓰레기봉투를 들고 따라 나섰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산책을 나갈 때 늘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박 군만 따라오라’ 하셔서 저만 따라 나갔습니다. 말없이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같이 앉으라’ 하시고는 ‘집은 샀느냐’ ‘가족들은 건강하냐’ 물으셨죠. 그러더니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집권이) 18년 됐지? 지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20년 되는 해에 전격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어때? 그러는 게 좋겠지?’ 물으시는 거예요. 그냥 한 번 생각난 김에 툭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게 표정에서 다 느껴졌습니다. 속으로 너무 놀랐죠.”

―뭐라고 답했나요.

“감히 제가 뭐라고 해요. 그날 전 너무 놀라 며칠 멍하게 보냈습니다.”

그는 1979년 그날 이후 매년 한두 번씩은 꼭 박 전 대통령을 꿈에서 본다고 한다.

“생전에 일하시던 모습 그대로 보여요. 그러면 잠을 못 잡니다. 가슴이 무너지기도 하고 우울해지고 허무해지고.”

시종일관 온화했던 그의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 그러더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 李대통령 내곡동 사저가 세간에 오르내리는데… ▼

1976년 서울 북악산 계곡 청소하는 박정희 1976년 서울 구기동 북악산 계곡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그라미 안이 박상범 씨.
1976년 서울 북악산 계곡 청소하는 박정희 1976년 서울 구기동 북악산 계곡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동그라미 안이 박상범 씨.
박 전 실장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사람이다.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해병대 장교로 입대해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에는 동굴 수색작전 중 박격포탄을 맞았는데 불발탄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과속 승용차에 치일 뻔한 순간에도 낙법을 구사해 부상하는 선에서 그쳤다고 한다. 고교 시절부터 익힌 유도 합기도 실력이 출중해 경호실 내 최고수 중 한 명으로 꼽혔을 정도다. 해병대 대위로 제대한 직후인 1971년 2월 그의 두뇌와 무술실력을 탐낸 당시 박종규 경호실장의 적극적인 권유에 따라 공채 1기 시험을 1등으로 통과하고 경호실에 들어왔다고 한다.

―경호라는 일은 뭔가요.

“흔히 무술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육감이 중요합니다.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뇌로 느껴서 액션을 하는 데 0.2초가 걸려요. 사람은 그동안 2m를 움직일 수가 있어요. 다시 말해 경호원은 대통령과 가해자 사이 2m 안쪽에 있어야 막을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사람이 갑자기 움직이면 공기 흐름이 바뀝니다. 그것을 감지할 정도가 되는 사람이 (대통령) 근접경호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잡아챌 수가 있죠.”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부산 열차사고 현장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차가 좁은 길을 빠져 막 큰 길로 들어서는데 시민들이 몰렸다. 대통령이 예정에 없이 차에서 내렸다. 늘 보이지 않던 곳에서 경호를 지휘하던 박 전 실장이 ‘안 되겠다’ 싶어 바짝 옆에 붙었다고 한다. 순간 뒤쪽에서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직감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움켜쥐었는데 20대 청년의 어깻죽지였다. 악수를 하려고 돌진한 사람이었지만 테러범이었다면 큰일이 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79년 4월 경주 보문호 10·26이 터지기 몇 달 전인 1979년 4월 경주 보문단지 보문호 앞에서 경호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박 대통령. 동그라미 안이 박상범 씨.
79년 4월 경주 보문호 10·26이 터지기 몇 달 전인 1979년 4월 경주 보문단지 보문호 앞에서 경호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박 대통령. 동그라미 안이 박상범 씨.
―김영삼 정부 때인 19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서는 김일성 사망을 예견했다면서요.

“방북을 며칠 앞둔 날 밤이었는데 김일성이 하얀 옷을 입고 관에 누워 실려 나오는 꿈을 꾼 거예요. 집사람에게 이야기했더니 ‘북한 가고 싶지 않아 꾀부린다 할 수 있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해요. 최종 인원 점검을 하는 날 제가 농담처럼 ‘만약 김일성이가 죽으면 북한 갈 수 있느냐’고 물었죠. 그제서야 꿈 이야기를 했더니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나를 도사라고 부르겠다 놀리더군요. 그런데 진짜 죽었습니다.”

―우연 아닐까요.

“누구나 뭔가 한 가지에 몰두하면 영상이 떠오를 때가 있죠. 그런 것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하면서 혹시 김일성이 죽을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깊이 생각했더니 꿈을 꾼 것 같고.”

―그런 경지까지 가려면….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집념과 집중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경호는 종합예술이자 과학입니다. 공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날씨에서부터 사람의 심리도 바로 알아야합니다.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도 물론 알아야 하고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그렇게 깊었는데 이후 다른 대통령을 모실 때에는 좀 힘들지 않았나요.

“일을 그만두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에도 사표를 냈는데 전 대통령께서 저를 따로 불러서 ‘남아서 노태우 대통령을 좀 도와줘라’ 하셨죠…. 청와대 경호실은 대통령을 경호하는 곳이지 특정 대통령 개인을 충성해서 모시는 곳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경호실장이나 요직만 바뀌고 경호실은 90% 정도 남습니다. 전문성이 중요하지 정치바람에 왔다 갔다 하는 조직이 아니니까요.”

―모두 다섯 대통령을 경호했는데 느낀 점이 있다면….

“대통령이란 자리는 애국자가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비가 와도 걱정, 안 와도 걱정, 자나 깨나 국민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어떤 대통령이든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친인척 비리는 모든 분들에게 참 골치 아픈 것이죠. 근데 이것도 대통령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면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질 않으니까요.”

―한 권력이 탄생했다가 또 사라지는 것을 봐오면서 권력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을 많이 해 보았겠어요.

“권력이라는 것이 뜬구름 아닙니까. 그런데도 하나같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순간부터 본인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도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발을 들이면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역대 대통령 모두 지금 같은 임기 말이 되면 어라, 일 년밖에 안 남았어? 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혼잣말처럼 “그럴 때면 대통령들의 뒷모습이 늘 쓸쓸해 보였다. 예외가 없었다”고도 했다.

―그건 무슨 말이죠.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자리인데 일단 하면 제일 하기 싫어하는 자리가 됩니다(웃음). 한마디로 창살 없는 감옥이잖아요. 혼자만의 시간도 거의 없고 24시간 누군가 붙어 있고. 어디다 대고 욕하고 싶어도 못 하고. 또 국가 중대사를 혼자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입니까. 심리적 압박감은 어떻고요. 임기가 끝날 즈음에 대통령을 가까이서 보면 유난히 어깨가 축 처져 있고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 사람에 대한 회의도 생겼을 것 같아요.

“청와대에 있다 보면 밖에서는 훌륭하다고 존경받는 지도층 인사들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구나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 국민이 허상을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참 허무하지요.”

―경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제일 힘든 대통령은 누구였나요.

“전두환 대통령이었습니다. 도무지 가만히 계시질 않으셨으니까요(웃음). 군부대, 소방서, 경찰서, 관공서…내키는 대로 들이닥치셨어요. 갑자기 파출소에 찾아가서 봉투 ‘탁’ 주면서 ‘고생들 많다’고 하고 가신 적도 있죠. 그런데 경호 차원에서 볼 때는 (대통령이) 불시에 움직이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동선(動線)이 완벽하게 비공개되는 셈이니까요. 어떻든 다른 대통령들은 대체로 스케줄대로 움직였는데 전두환 대통령만은 예외였어요. 오후 11시에 겨우 퇴근하면 오전 2시에 비상벨이 또 울리고. 지방 출장 가면 항상 옷 입고 귀에 리시버 꽂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대기하고 있었죠.”

그는 ‘3분 대기’로 평생 살다 보니 왼쪽 귀가 아예 안 들리는 것은 물론이고 24시간 귀 속에서 울리는 찌이익 하는 양철 긁는 듯한 소리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어떻게 사느냐”고 했더니 “직업병이죠”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웅산 사태(1983년)도 겪으셨죠.

“당시 부하 직원 두 명이 죽었습니다. 며칠 전(9일)이 기일이었습니다.”

그는 기억이 생생한 듯 차분하게 당시 상황을 전했다.

“대통령이 묵던 영빈관에서 사고 난 아웅산 묘역까지 차로 5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인데 중간에 고개가 있어요. 대통령이 탄 차 뒤 경호차 앞좌석에 앉아 막 고개를 내려가려는 찰나 ‘꽝’ 폭탄이 터지는 것을 보고 급히 차 두 대를 돌렸죠. 그때 조금만 일렀더라면….”

당시 묘역에 폭탄을 설치해 터뜨린 북한의 테러로 우리 정부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순직했다. 박 전 실장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병원에 들러서 굳이 환자를 보고 가겠다는 대통령을 따라 병원에 들른 뒤 비행기를 탔는데 남은 공식 수행원이 공보수석 의전수석 경호실장 셋밖에 없는 거예요. 그때의 참담한 심정이란….”

―YS 때 차남 현철 씨의 전횡에 대해 직언을 해 결국 청와대를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1994년 12월)…. (직언을 하는 것은) 경호 업무에서 벗어난 것 아닌가요.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 대통령이 제일 강조했던 것이 ‘깨끗한 정치’였는데 자칫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호실장은 참모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일이 그렇게 되었지요.”

―요새 내곡동 사저문제 때문에 경호실장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정무적 판단이 잘못된 거라고 봅니다. 서민들이 전세난에 집이 없어서 난리 아닙니까. 게다가 700평 가까이나 되는 땅(648평)에 경호동을 지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는 경호원 시절 집을 나설 때 부모님께 ‘다녀오겠습니다’ 대신 ‘저, 갑니다’라고 인사했다고 한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집을 나섰다는 것이다. 종교가 있는지 물었다.

“경호원이 된 것부터 그렇고 이후 그만두려고 해도 안 되고…. 팔자란 것이 있는 것 아닌가, 정해진 길이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을 많이 하죠. 절대자를 믿기보다 저 자신을 믿는 편이죠. 마음을 굳게 먹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요.”

―젊었을 때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영향이 큰가요.

“덤으로 사는 인생인데 잘 살아야겠다, 남한테 손가락질받지 말고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살고 죽는 것에 대해서도 아등바등하지 말자, 그런 생각도 들었고요.”

―10·26 현장에서 살아난 게 후배들이 확인사살을 일부러 안 해서 그랬다는 후문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조사과정에서 조사반원들이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주기는 했습니다만…. 뭐 다 죽었으니 확인할 길이 있나요. 제가 그 친구(중앙정보부 직원)들을 잘해주긴 했죠. 고생하던 친구들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형, 형 하며 많이 따르긴 했습니다.”

1998년 보훈처 장관을 끝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공직생활 마치고 여기저기서 고문으로 와라, 차를 대주고 한 달에 얼마를 주겠다 유혹이 많았는데 내가 도울 일이 없어 다 거절했다”며 “12년 전에 중국 교포를 돕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일하는 게 유일한 대외활동”이라고 했다. 이번 인터뷰에는 경호실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가 동석했다. 박 전 실장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에 대한 평을 청했다.

그는 “선배를 보면서 세 번 놀랐다”며 “일에 대한 엄청난 몰입에 놀라고, 권력의 핵심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순수하게 지켰을까 하는 점에 놀라고, 일에서는 철저하지만 마음이 또 한없이 따뜻해서 놀랐다”고 했다.

“대부분 경호실장의 말로가 좋지 않았다”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박 전 실장은 “경호실장은 대통령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대통령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알게 되니 본인도 모르게 권력화된다. 문민정부 경호실장으로 발탁됐을 때 경호실장도 한 사람의 경호원이라는 다짐을 했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장시간 인터뷰가 끝났다. 그로부터 박제화된 박정희 시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시공간을 넘어서 한 사람의 직업인이 가져야 할 몰입과 진지함과 프로근성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의 시대에는 그런 삶이 다수였으리라. 무에서 유를 만든 한국의 기적을 일군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 혼자가 아니라 ‘수많은 박상범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 박상범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약력 ::

1964년 고려대 법대 졸업
1969년 해병대 대위 예편
1970년 청와대 경호관으로 채용
1983∼1990년 경호처장
1990∼1992년 민주평통 사무차장
1993∼1994년 청와대 경호실장
1994∼1997년 민주평통 사무총장(장관급)
1997∼1998년 보훈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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