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권오기 前동아일보사장 - 통일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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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4일 03시 00분


독재권력 견제 앞장섰던 강직한 언론인

3일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3일 권오기 전 동아일보 사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에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3일 타계한 연곡 권오기(蓮谷 權五琦) 전 동아일보 사장은 강직한 언론인이자 관료로서는 남북문제와 동북아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통일부총리였다. 기자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했지만 굴하지 않고 정론직필의 언론 정신을 실천했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권력 견제의 일선에 섰던 고인은 그로 인해 정권의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을 경험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66년 3월 25일자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독단적 통치 행태를 비판하는 시리즈 ‘독주(獨走)’가 게재됐다. 그 시리즈의 하나로 ‘소신은 만능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던 최영철 기자가 같은 해 4월 25일 저녁 귀가하던 중 신원 미상의 청년 두 명에게 폭행을 당했고, 이어 당시 정치부 차장이었던 고인이 7월 20일 귀가 도중 다시 괴한들에게 폭행을 당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잇따른 기자 폭행 사건에도 불구하고 12월 31일자 송년 사설에서 “벌거벗은 힘이 도의를 이기는 정치, 돈의 액(額)이 법률을 비웃는 경제,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회, 이 모두가 폭력의 온상이 아닌가”라며 정론직필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1966년부터 1980년 동아방송(DBS) 폐방까지 이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인 ‘노변야화’ ‘정계야화’ ‘DBS초대석’ 등의 진행을 잇달아 맡았던 고인은 김수환 추기경, 김종필 전 국무총리,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당대 최고 명사들로부터 자신의 삶과 사회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끌어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3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한 고인은 그해 4월 1일부터 조간 체제로 이행하는 동아일보의 변화를 선두에서 이끌었다. 정보 중심으로 지면 내용을 쇄신해 당시 화두였던 국제화 정보화 생활화 지방화 시대에 발맞췄다.

통일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던 고인은 오랜 취재와 연구에 바탕을 둔 전문가적 식견을 인정받아 1995년 12월 제23대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에 취임했고 2년 2개월 동안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끌었다.

1998년 울산대 재단이사에 이어 1999년 이 대학 석좌교수에 취임한 그는 ‘북한의 어제와 오늘’ ‘한국정치와 언론’이란 제목의 교양 과목을 가르쳤다. 도쿄 특파원 당시 한일수교 과정을 지켜보는 등 일본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통일부총리를 지내며 북한 사정에도 해박했던 지식을 후학들에게 전달했다.

고인은 ‘2005년 한일 우정의 해’를 앞둔 2004년 11월 당시 아사히신문의 와카미야 요시부미 논설주간과 양국 간 100년사를 조망하는 대담집 ‘한국과 일본’을 펴냈다. 2003년 10월부터 9개월간 4회에 걸쳐 진행한 대담을 엮은 이 책에서 고인은 “일본인을 한 사람도 알지 못하는 한국인이 일본을 논하는 것은 공허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고인과 와카미야 논설주간은 국제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국가 간 연합이 필요하다고 제안하며 아시아의 평화를 역설했다.

3일 빈소를 찾은 이경식 전 공보처 차관은 “고인과 함께 동아일보에 재직하던 시절 고인이 ‘현장에서 뛰고 부딪치다 실패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서 미리 재단하고 판단하는 건 안 된다’고 늘 강조했던 일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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