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1922∼2009)의 ‘바보 사랑’은 하심(下心·자신을 낮춤)으로 옮길 수 있다. 스스로 끊임없이 낮추지 않으면 그런 경계 없는 사랑이 불가능하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조차 품에 안으려고 했던 분이다.
2009년 2월 16일 서울 영화사에서 추기경 선종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아직 시신이 도착하지 않아 1시간 반을 기다린 뒤 조문했다.
가는 길 내내 여러 상념에 빠졌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황망했다. 깊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1971년 청담 스님 열반 때 조문 온 추기경을 처음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만난 뒤 40년 가깝게 알고 지냈다. 그때 나는 총무원 교무부장이었다. 앞서 세상을 뜬 강원용 목사(1917∼2006)와 추기경, 그리고 나는 종교가 달랐지만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삼각형 같은 관계였다. 외환위기와 노사갈등, 공명선거, 민족화해와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 세상이 필요로 하는 요구에 맞춰 2인3각이 아니라, 3인4각으로 숱한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한 사람이라도 빠졌다면 너무도 허전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추기경은 열세 살 연상으로 띠 동갑도 넘었지만 나를 부르는 호칭은 언제나 ‘총무원장 스님’ ‘송월주 스님’이었다.
추기경을 만날 때마다 사심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을 떠올렸다. 1997년 ‘외채상환 금 모으기 범국민운동’ 때의 일이다. 추기경이 금 십자가를 갖고 왔다. “십자가면 신앙의 상징인데…”라고 하자 추기경은 “예수님은 몸도 십자가에 바쳤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죠”라며 특유의 미소를 보였다.
김 추기경의 삶에는 파격적 행보가 허다했다. 1997년 서울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했고, 2000년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유림의 상징인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심산상(心山賞)을 수상한 뒤 묘소를 참배했다. 2002년에는 서울 북한산 도선사에서 열린 청담 스님 탄생 100주년 기념 법회에 참석해 축하인사를 했고, 달라이 라마 방한 준비위원회 고문을 맡기도 했다. 김창숙 선생 묘소 참배 뒤 열린 종교인 모임에서 그의 참배가 화제가 되자 추기경은 대수롭지 않게 “민족지도자인데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한 종교의 틀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2000년대 이후 추기경을 둘러싼 일부의 비판과 오해가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다. 내가 지켜본 추기경은 그 누구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건국정신을 몸과 마음으로 지켜온 분이다. 그 정신대로 되지 않으니까 반독재운동에 나서고, 성당도 빌려 준 것이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추기경이 변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추기경은 생전 좌나 우로 치우지지 않고 중도(中道)를 걸었고, 누구 한쪽의 편이 아니라 국민화합의 큰 그림을 그렸다. 추기경이 변했다기보다는 세상이 바뀌었고, 그가 변했다고 하는 사람들 자신이 변한 것이다.
일부에선 ‘북한보다 미국이 더 위협적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는 추기경의 발언에 딴죽을 걸기도 했다. 그 뒤 종교인 모임에서 갑론을박이 있었다. 한 참석자가 그 딴죽에 동조하는 말을 했지만 추기경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추기경은 말수가 적었다. 몇 차례 권해야 운을 뗐다. 삶의 모든 모습에서 품위를 지켰다. 강 목사와 추기경, 셋이서 사진을 찍을 때면 추기경은 언제나 강 목사의 연배가 높다고 자리를 양보했다.
2008년 나는 청와대에 친필 서한을 보냈다. 추기경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 대화합을 위해 큰 업적을 세운 나라의 큰 어른인 만큼 만약 타계하면 국민장에 준하는 사회장으로 모시도록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을 거쳐 의견이 모였지만 결국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러졌다. 당시의 편지는 내 마음이었다.
보현보살은 문수보살과 짝을 이뤄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지혜를 이 땅 위에서 행동으로 실천한다. 추기경의 삶도 불교적으로 보면 끝없는 보현행 아니었겠는가. 천주교는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그분에게 큰 빚을 졌다.
평소 종단을 대표한다는 격식 때문에 언제나 추기경님, 송월주 스님으로 서로를 불렀지만, 추기경이 선종한 그날만은 ‘형님’ ‘바보 형님’ 이런 말이 내 마음속에 들어 있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⑤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종교와 종교, 계층과 사회 속 대화를 위해 살아온 강원용 목사를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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