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는 가르침을 근거로 불교야말로 생태계 파괴와 빈곤 등 생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성경 자구(字句)에 구애되지 않는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안목을 가진 목자였습니다.’
강원용 목사(1917∼2006)가 8월 17일 타계한 뒤 며칠 지나 내가 불교신문에 쓴 추모글 일부다.
강 목사와 김수환 추기경, 그리고 나 셋 중 강 목사는 실제 나이가 가장 많았고, 큰형 같은 존재였다. 각자 하나의 종교를 대표하기에 언제나 서로 깍듯하게 존칭을 썼지만 분위기를 전하자면 그랬다. 추기경이 과묵하고 속 깊은 스타일이라면, 강 목사는 연락도 자주 하고 소통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대화의 선구자’, 이처럼 강 목사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도 없다. 달변과 다변, 그리고 자리를 끌어가는 데 능숙했다. 청담 스님과 가깝게 지낸 강 목사는 한 번 오면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곤 했다. 19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설립한 뒤 종교와 지역, 정파 간 대화를 위해 평생 노력했다. 청담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있던 1960년대 후반 불교도대회에서 강 목사가 축사를 했다. 여러 종교가 함께 시대와 역사를 위해 역할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종교 간 연합 행사나 교류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강 목사처럼 말하고 행동하려면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했다.
강 목사의 정치적 활동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국정자문회의 참여도 그중 하나다. 강 목사가 오랫동안 시무한 경동교회에 다니던 황영시 장군이 찾아와 자문회의 참여를 권유했다. 훗날 강 목사는 “DJ(김대중)와 정동년을 살려 달라”는 자신의 조건을 수락하기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 때에는 국무총리 설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김 추기경은 근본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없었지만 강 목사는 정치적 욕구가 있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강 목사의 기여와 희생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도 사회적 구원이 필요하다고 믿은 강 목사의 신앙관에서는 사회, 정치적 참여가 자연스러웠다는 뜻이다.
신학은 물론 역사와 정치에도 해박했던 강 목사는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광복 직후 정치 지도자의 노선을 긍정적으로 자주 언급했다. 특히 여운형의 경우 15세 때부터 심취했다고 말하기에 내가 “결국 실패한 지도자가 아니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무기는 대화였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제3의 지대’에 서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마련한 장(場)에는 종교와 지역, 계층을 뛰어넘어 많은 이들이 모일 수 있었다. 대화 하나로 권력을 견제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강 목사의 정신은 불교의 중도(中道)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다른 종교와 종교인을 바꾸려는 개종주의자가 아니라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한 동반자였다.
2006년 6월, 내가 대표로 있던 지구촌공생회 행사가 있어 연락했더니 강 목사는 여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왔다. 그때 강 목사는 “스님께서 제가 주최하는 행사에 자주 오셔서 (몸이) 불편하지만 왔습니다.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1995년 총무원장으로 부처님오신날 행사의 봉행위원장을 하면서도 잠시 틈을 내 크리스챤아카데미 창립 30주년 행사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그 대화가 끝이었다. 강 목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측이라도 한 듯 2개월 뒤 세상을 떴다.
올 6월 가톨릭의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불교의 맑고향기롭게, 개신교의 대화문화아카데미(옛 크리스챤아카데미)가 주최한 행사에 참석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강 목사는 개신교의 사명이 ‘세상의 개신교화(化)’가 아니라 ‘인간화’에 있다고 믿었다. 우리 사회에 그 언제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화해의 씨앗을 심었다”고.
강 목사는 사랑과 자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이를 실천한 분이었다. 자문(自問)해 본다. 왜 요즘은 그런 분이 드물까.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⑥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맑고 향기로운 무소유의 삶이지만 젊은 시절 펜촉처럼 날카로웠던 법정 스님을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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