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⑭ 고은 시인 “고얀 놈, 일초를 잡아라.”

  • Array
  • 입력 2011년 11월 21일 03시 00분


<156>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59년 서울 조계사에서 공동으로 결혼식 주례를 진행한 당시 일초 스님(고은 시인·왼쪽)과 미당 서정주 시인(오른쪽). 시인은 스님 시절 100여 회의 주례를 했다고 밝혔다. 고은 시인 홈페이지
1959년 서울 조계사에서 공동으로 결혼식 주례를 진행한 당시 일초 스님(고은 시인·왼쪽)과 미당 서정주 시인(오른쪽). 시인은 스님 시절 100여 회의 주례를 했다고 밝혔다. 고은 시인 홈페이지
너무 괘씸했다. 그래서 종무원 몇 사람을 불러 그를 잡아오라고 했다. 그가 자주 왕래하는 잡지사 주변에서 여러 번 기다리기도 했다. 허사였다. 이쪽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좀체 잡을 수가 없었다. ‘일초(一超)가 정말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초는 일초 스님, 나중 시인으로 유명해지는 고은이다. 그는 1962년 환속하자마자 절집을 비난하는 글을 싣기 시작했다. 불교가 기복(祈福)만 하고 있다, 여 시주 치마폭에 싸여 있다, 사회성이 없다 등 거친 얘기였다. 이에 나이 지긋한 스님들은 “매우 고얀 놈”이라 했고, 총무원과 선학원에서 한솥밥 먹던 스님들의 불만도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초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

1950년대 후반 처음 만난 일초 스님은 효봉 스님의 상좌로 나보다 두 살이 많지만 격의 없이 지냈다. 이미 서정주 시인과 가깝게 지내며 ‘폐결핵’으로 등단한 스님은 당시에도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

어느 날 내가 전진한 김두한 정일형 씨의 선거 유세를 보고 그 분위기를 전했다. 그랬더니 방 안에 누운 채 책을 보다 무언가를 긁적거리던 스님은 “화상(和尙·스님의 다른 호칭)은 정치 좋아하네”라며 빙긋이 웃었다. 스님은 일어도 능숙하고 영어 책도 보는 등 천재형이었다.

“은행 나무/한 구루와/한 구루가/오직 한 임을 보고, 가는 바람에 잎이 깨이다.//어디 한 임 뿐이리요 허, 허, 히,//청담(靑潭)스님 석주(昔珠)스님/미산(彌山)스님도 깨이다 자다 하다./다 그러 하다….”

일초 스님이 주필로 있던 불교신문에 쓴 시 ‘선학원에서’의 일부다. 속명이 고은태인 그는 ‘고일초’ ‘일초’ ‘고은’ 등 여러 이름으로 시를 썼다.

그때 이미 스님과 불가와의 인연이 그리 길지 못할 조짐이 보였다. 술에 얽힌 기행이 계속됐고, 찾아오는 여성도 적지 않았다. 수행자라기보다는 예술가적 자유분방함이 훨씬 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양복을 입고 나왔다. 스님은 이리저리 물어도 대꾸 없이 웃다 짐을 꾸려 떠났다. 일초 스님이 아닌 시인 고은이 된 것이다.

고얀 놈 사건 뒤 2년이 지났을까. 1967년경 시인이 동국대 옆에 있던 옛 총무원 청사를 찾아왔다. 경산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있던 시기였다. 불쑥 찾아온 그는 경산 스님 앞에서 대뜸 무릎을 꿇고 참회의 뜻을 밝혔다. 이유야 어찌됐든 참회하는 이를 내치지 않고 품는 것이 불가의 모습이다.

이후 그는 민주화운동과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나는 종단 개혁과 불교 자주화를 위해 노력했다. 피차 마주칠 기회는 드물어졌다. 시인이 제주 원명사에서 팔만대장경을 공부하면서 암송 뒤 종이를 씹어 삼킬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그가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을 때에는 팔만대장경을 의역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오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한 모임에서 시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환속 뒤 우리 사회의 열악한 현실에 눈을 뜨고 문학과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스님은 종단 개혁에 이어 이제는 비정부기구(NGO)를 통해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대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정말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1996년 내가 화갑기념논총 ‘보살사상’을 낼 때, 시인은 ‘세상의 보배’라는 축시를 통해 나를 과찬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이 대수일까. 거꾸로 이미 그는 불교계뿐 아니라 세상의 보배다. 언젠가 그는 자신의 작품들이 불교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초에서 시인 고은까지. 어쩌면 그의 삶은 불가의 전통적 방법을 따를 수 없었던 그가 선택한 그만의 수행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⑮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의 인연을 얘기합니다. 스님은 개신교 신자가 된 이 전 장관에 대해 “불교의 공(空) 사상을 그렇게 예찬했는데…”라며 좀 섭섭해하는 눈치입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