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고건 명지대 총장이 찾아왔다. 큰일을 앞두고 원로들의 조언을 많이 구하던 그는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용 목사에 이어 나를 찾아왔다. 고 총장은 그 선거에 나서지 않았고, 나중에 조순 씨가 출마해 당선됐다.
3년 뒤 비슷한 주제의 대화가 이어졌다.
“조세형 총재 권한대행이 출마를 권유하던데요. DJ의 뜻이라는데….”
“지금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였다. 결국 그는 출마해 민선 2기 시장이 됐다.
그는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탄핵 사태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을 뿐 아니라 총리와 서울시장을 두 차례씩이나 지낸, 말 그대로 ‘행정의 달인’이다. 유능함과 청렴,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인 성향도 그의 매력이다.
고 전 총리와의 인연은 전북대 총장을 지낸 그의 부친 고형곤 박사(1906∼2004)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박사는 한때 국회의원도 했지만 철학자이자 불교학자로 큰 업적을 남겼다. 고 박사 생전에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들에게 세 가지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어느 파당에도 휩쓸리지 마라, 돈을 멀리해라,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겁니다. 근데 돈과 파당 문제는 잘 지키는데 술은 못 끊는 것 같습니다. 그걸 빼면 내 아들이지만 믿을 만합니다.”(고 박사)
바둑도 아닌 정치에서 ‘복기’가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고건이란 인물에게 정치는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그는 2006년경 한때 3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며 대선 출마를 준비했다. 당시 그를 만나 “정말 대권에 뜻이 있다면 북한 핵실험 등 이슈에 대해 명확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2007년 1월 대권 포기를 선언했다.
나는 출가 인생 50여 년을 불교정화와 종단개혁이라는 필생의 목표를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은 때로 쓸개가 바싹바싹 마를 듯 힘겨웠지만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나라를 경영하는 대권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훗날 고 전 총리는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DJ와 노무현 대통령, 호남 그룹 등에서 지지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이 계속 이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물론 그는 “아쉬웠다” “후회한다”는 식의 언급은 하지 않았다.
내가 지켜본 고 전 총리는 본인이 섭섭해할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정치인이 아니다. 누구를 공격하거나, 돈을 끌어 모으거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엮는 것과는 체질적으로 거리가 멀다. 밥상을 차리기보다는, 차려진 밥상을 다른 이들과 골고루 나눠 맛있게 잘 먹는 스타일이다.
역대 정권의 권력자와 관련해 이런저런 말이 나올 때가 있다. 누구보다 그들을 잘 아는 고 전 총리는 “이 대목은 내가 알고 있는데 잘못됐다”고 할 뿐, 흐름에 편승하는 법이 없다. 딱 거기까지다. 대선 과정에서 그를 지지한 한 분은 “고 총리는 좋은 대통령 감이지만 좋은 대통령 후보는 아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개신교 신자인 고 전 총리는 불교계와도 인연이 각별해 1995년 연등축제의 제등행렬을 시 문화행사로 등록하고, 우정로 정비사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개신교 등 다른 종교계에도 비슷한 형태의 지원이 가능한가를 타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공평무사(公平無私)가 몸에 밴 행정가다. 극단적인 주장이 힘을 얻는 요즘 분위기에서 그가 설 입지는 매우 좁다. 그래서 그의 경륜이 아깝다. 언젠가 그의 부친과 나눈 술 얘기를 꺼냈더니 그는 “아, 그렇지요”라며 특유의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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