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들어갈 때는 우봉 스님이 살림 맡고, 보문 스님하고 자운 스님하고, 내(나)하고 이렇게 넷이 들어갔습니다. 청담 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야총림 한다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못 들어오고, 서로 약속은 했었지만 그 뒤로 향곡, 월산, 종수 스님, 젊은 사람으로는 도우, 보경, 법전, 성수, 혜암, 종회의장 하는 의현이는 그때 나이 열 서너 댓 살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멤버가 20명 됐습니다.”
성철 스님은 1982년 법문을 통해 봉암사 결사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1947년의 일이다. 당시 봉암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경북 문경시 봉암사는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로 879년 창건된 고찰이다. 내가 출가하기 이전 일이지만 청담 스님과 사형 월산 스님 등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적지 않다. 나뿐이랴. 봉암사 결사는 불문에 귀의한 스님뿐 아니라 재가 불자도 귀가 따갑도록 들은 하나의 ‘전설’이다.
성철 스님은 1941년 충남 예산군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지냈다. 이곳 능인선원에는 당대의 선지식(善知識) 만공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 스님은 여기서 도반 청담 스님을 만났다. 둘은 처음 보는 순간 상대방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존재가 될지를 한눈에 알아차린 모양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청담 스님이 열 살 위였지만 문제 될 게 없었다. 나중에 총무원 주변에서는 나이 어린 성철 스님이 말을 놓는다며 수군거렸다. 이에 청담 스님이 “그런 지 한참 됐다”며 웃던 기억이 난다.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과 나 사이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그런 사이”, 청담 스님은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던 모양”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45년 광복 뒤 두 스님은 우리 불교를 바로잡자는 대의에 의기투합했다. 결론은 선원, 율원, 강원을 모두 갖춘 전통적인 방식의 총림(叢林)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해인사에 총림을 세우려고 했지만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대처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두 스님은 서울의 한 거사가 갖고 있던 희귀 불서를 구해 봉암사로 보냈다.
그 뒤 1947년 가을 걸망을 멘 성철 스님이 봉암사로 향했다. 처음 넷이서 시작한 결사는 보안, 법웅 스님이 가세해 10여 명이 됐고 다음 해 청담,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 스님이 합류했다. 해인사 일로 청담 스님이 뒤늦게 합류하자 성철 스님은 “와 이리 늦었노. 그래 가지고 공부하것나. 퍼뜩 들어오그라”며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맞이했다고 한다.
이들은 결사대중이 늘어나자 결사의 이론적 기초와 방향, 원칙을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정했다. 비불교적 요소부터 없앴다. 절에서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를 없애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스님이 불공 중간에 축원한다며 목탁 치는 것도 본래 없었다며 없앴다.
더 중요한 것은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엄격한 수행공동체의 규율이었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중국 당나라 때의 백장 선사가 남긴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유래한 것이다.
봉암사에서 불공을 하지 않고 기도 염불을 폐지하니 신도들도 떨어져 절집 살림살이는 더 어려웠지만 결사대중들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성철 스님은 한술 더 떴다. 제대로 수행하라며 “밥값을 내놓아라”라는 호통과 함께 세숫물로 떠놓은 양철통의 물을 한 스님의 머리 위에 끼얹는가 하면 다른 스님에게는 재가 가득 찬 놋 향로를 씌우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의 여파로 군경과 빨치산이 번갈아 드나들며 스님들의 안전마저 위험한 상태가 됐다.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해체되었다.
종단사를 돌이켜볼 때, 봉암사 결사는 수행자들의 유토피아적 공동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현실과 직접 부딪쳐 싸워야 했던 정화운동과는 결이 다르다. 우리 불교계의 결사로는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 한암 스님의 건봉사 결사, 용성 스님의 참선만일 결사 등이 알려져 있다. 공통적으로 불교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선 수행, 후 참여’의 성격이 강하다.
그렇다고 봉암사 결사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봉암사 결사는 4년에 불과했지만 그 파장은 컸다. 결사 참가자 가운데 청담 성철 혜암 법전 4명의 종정이 나왔다. 부처님 법대로 살기 위해 모인 이들은 스스로 모였고, 철저했고, 위엄이 있었고, 건강했다. 종단 안팎의 위기가 올 때마다 그 결사의 정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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