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26>광덕 스님… “전법(傳法)이 구도(求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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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7일 03시 00분


<168>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젊은 시절 방송에 출연한 월주 스님(왼쪽)과 광덕 스님. 도심포교의 선구였던 광덕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참여와 실천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불광사 제공
젊은 시절 방송에 출연한 월주 스님(왼쪽)과 광덕 스님. 도심포교의 선구였던 광덕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참여와 실천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불광사 제공
“나는 불자다. 부처님의 진리생명이다. 오늘 하루 좋은 일이 찾아온다고 매일 10번 이상 소리를 내서 말하고 일어납시다. 그리고 내 생명 가득히 부처님의 진리가 태양처럼 솟아오른 것을 마음의 눈으로 지켜봅시다. 진리의 태양이 나의 생명, 나의 가정, 나의 사업, 우리 겨레 위에, 다시 온 누리 중생에게 퍼지는 것을 생각하고 저들 모두의 평화, 행복을 기원합시다.”

한국 불교의 도심포교와 현대화에 큰 업적을 남긴 광덕 스님(光德·1927∼1999)의 생전 법문이다. 스님은 1952년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의 사제다.

나와 광덕 스님은 1950년대 처음 만나 종단 소임을 맡아 오랜 인연을 맺었다. 1971년 청담 스님이 입적했을 때에는 내가 교무부장, 광덕 스님이 총무부장이었다. 광덕 스님은 청담 스님의 갑작스러운 입적 뒤 총무원장 직무대행을 맡기도 했다.

두 사람은 젊은 스님들답게 한국 불교의 미래에 대한 우려와 고민을 자주 토로했다. 광덕 스님은 “출가해 수행하지만 한국 불교는 무상하고 지나치게 허무주의가 짙다”며 “선문답에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세상을 구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광덕 스님은 당대를 대표하는 선지식인 동산 스님의 제자였고 선(禪)수행과 금강경에도 밝았다. 그러나 현실세계와 거리를 두는 불교의 초세간적인 분위기를 자주 비판했다. 결국 스님은 산에서 내려왔고, 종단을 거쳐, 다시 도심으로 걸어 들어갔다. 도심의 불자들 사이에 스님의 길이 있었다. 철저하게 수행 위주로 살아간 성철스님과는 다른 길이다.

1950, 60년대 종단에는 젊은 인재가 적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법명을 높인 이들이 숭산, 광덕, 법정 스님이다. 이런 비유도 있었다. ‘선(禪)은 숭산, 글은 법정이지만 두루 갖춘 이는 광덕이다.’

스님은 1965년 창립된 대학생불교연합회의 초대법사를 맡고, 다시 서울 강남구 봉은사에 대불련 수도원을 설립했다. 수도원이라는 명칭도 그렇지만 획기적인 시도였다. 학생들은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아침, 저녁에는 정진했다. 하루 1000배 기도와 철야 정진 등 수좌처럼 생활했다. 당시 서울 혜화동의 서울대나 장충동 동국대 등 강북에서 봉은사에 오려면 배를 타고 건너는 고된 일과였다. 박세일(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성배 씨(미국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교수) 등이 이곳에서 수행했다.

스님은 1974년 불광회(佛光會)를 창립해 불교 대중화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추진력을 얻는다. 불광회를 시작으로 1975년 대중법회인 불광법회 창립, 1982년 잠실 불광사 창건이 이어진다. 불광사는 서울 구룡사, 능인선원 등 대규모 도심 포교당의 모델이 됐다.

불광은 부처님의 반야(般若·지혜)다. 반야 사상을 통해 인간의 마음과 삶을 밝게 비추고 나아가 사회의 성공과 행복, 번영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불교와 관련한 잡지나 출판사가 많지만 당시에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1974년 창간한 월간 잡지 ‘불광’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문서포교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고, 불광출판사 역시 불교계의 대표적인 출판사가 됐다.

생전 스님은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과 솔직담백한 말이 매력적이었다.

“제가 책 좀 읽었다고 해서 종단에 징발되어 10년 가까이 종단 행정에 관여한 것을 아실 겁니다. 그러다가도 틈만 있으면 팽개치고 산으로 달아났습니다. 꿩이 생각은 콩밭에 가 있다더니 도시에 나와 있으면서도 산중으로 달아나서 참선만 하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월간 ‘불광’을 만들게 되었고 우리 형제들을 만나게 되고, 불광 형제들을 만나 여러 형제와 더불어 이렇게 살게 됐습니다.”

스님은 입적 전 10여 년간 투병했다. 몸의 고통 때문에 누워 있다가도 ‘나는 죽지 않아’라며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만큼 불교를 위한 원력(願力)이 강했다. 병색이 완연했지만 법문에 들어서면 언제나 힘 있는 목소리로 대중을 만났다. 말하는 사람이 힘 있어야 그 기운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었다. 스님이 건강을 잃지 않고 더 살 수 있다면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스님이 추구한 불광의 길, 그것은 하나하나의 갈래까지 새로운 것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7> 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육비구할복’ 등 비구와 대처승의 갈등으로 파란이 많았던 불교정화운동의 초기를 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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