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27>육 비구 할복사건과 정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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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8일 03시 00분


<169>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60년 11월 23일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고재호 대법관을 찾아 정화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청담, 도명, 월탄 스님(오른쪽부터). 다음 날 발생한 월탄 스님등 육 비구 할복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박수천 전통문화포럼 대표 제공
1960년 11월 23일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고재호 대법관을 찾아 정화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청담, 도명, 월탄 스님(오른쪽부터). 다음 날 발생한 월탄 스님등 육 비구 할복사건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박수천 전통문화포럼 대표 제공
1960년 11월 24일 오후 3시경 당시 서울 서소문 대법원장실에서 이른바 ‘육(六) 비구 할복 사건’이 발생했다. 스님들은 불교 정화의 정당성과 이유를 설명한 뒤 준비한 칼로 복부를 찔렀고,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400여 명의 스님과 재가 불자들이 대법원에 들어가 소동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300여 명이 연행됐고 20여 명이 구속됐다. 동아일보가 육 비구 할복을 그해 10대 사건의 하나로 선정하는 등 사회적 파장이 컸다.

할복은 과격하게 느껴지고, 특히 불교 신도가 아니면 거부감이 더욱 클 수도 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불교 상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사건이기에 당시 많이 쓰던 승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제 말기 승려의 수는 7000여 명으로 추산됐다. 이 중 결혼해 부인이 있는 대처승(帶妻僧)이 아닌 비구승(比丘僧)은 300여 명에 불과했다.

일제는 현대화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불교의 일본화를 추진했다. 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 불교가 급격하게 유입되면서 우리 불교는 급속하게 청정성(淸淨性)을 상실했다. 이는 승려의 대처와 사찰 내 음주, 선 수행보다는 행정실무 선호, 친일 등으로 나타났다.

1954년 5월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수행과 청정성의 회복이라는 한국 불교 고유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시기로는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지금의 대한불교 조계종 출범까지가 해당된다.

불교 정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다. “불법(佛法)에 대처승 없다”는 구호야말로 정화운동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같은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불교 정화는 쉽지 않았다. 수적 열세뿐 아니라 종단 자체가 수십 년간 대처승 위주로 운영돼 왔기 때문이다.

비구승들은 1954년 6월 불교정화운동 발기위원회를 발족하고 위원장에 나의 은사 금오 스님을 추대했다. 은사는 당시 세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심산의 대사찰뿐 아니라 각급 사원까지 놀이터 내지는 유흥장으로 변해 법당 앞의 누각에는 술동이가 놓여 있고 기둥에는 돼지 다리가 걸렸으며, 취객의 가무음곡이 끊이지 않았다. …큰 사찰이 수도, 기도하는 도량이 아니고 사업장화돼 승려들은 양복에 가방을 들고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처자가 있는 속가로 퇴근했다.”

비구승들은 그해 9월 전국비구승대회 임시 종회를 개최해 비구승 중심의 종단을 구성했다. 종정은 만암, 부종정은 동산, 도총섭은 청담 스님이었다. 다시 11월 불교 정화를 촉구하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제2차 유시(담화)에 힘입어 비구승들은 대처 측 총본산인 태고사 간판을 제거하고, 그 대신 조계사와 불교 조계종 중앙총무원 간판을 달았다.

대의명분이야 당연히 비구 측에 있었지만 생존권이 걸린 대처 측의 저항도 격렬했다. 종단과 사찰의 관할 등을 둘러싼 양측의 갈등은 점차 폭력화됐고, 법정 소송도 계속됐다.

이 문제가 사회문제로 비화된 가운데 양측은 1955년 2월 정부의 중재로 승려의 자격으로 독신, 삭발염의(削髮染衣·머리카락을 깎고 승복을 입음), 수도, 20세 이상 등 8개 항을 합의했다. 정부는 이 기준에 맞는 승려가 1189명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8월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종정 석우, 총무원장 청담, 감찰원장 금오 스님이 당선됐다.

이후 정화운동은 급물살을 타지만 대처 측은 비구 종단을 정부의 지원을 받는 ‘관제불교 단체’로 규정한 뒤 사찰 재점거를 시도했다.

비구 측은 4·19혁명 뒤 어수선한 정치적 상황과 강력한 대처 측의 저항에 큰 위기감을 느꼈다. 청담 스님은 종단 운영을 좌우할 수 있는 대법원 판결에서 비구 측이 불리하다는 내용을 미리 입수했다.

이에 청담, 숭산 스님 등은 비밀리에 순교단을 모집했다. 20, 30대의 젊은 승려 6명이 자원했다. 당시 청담 스님은 이들에게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했다. 6명 중 한 명인 사제 월탄 스님에게 들은 얘기지만 청담 스님은 헝겊 등으로 칼을 감고 끝 부분만 남겨 생명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육 비구 중 성각(입적), 월탄 스님은 종단을 지켰고 나머지 4명은 환속했다.

이 사건은 세속적으로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비구승들의 결연한 의지와 정화운동이 대세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28>회에서 송월주스님은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등 권력과 정화운동에 대해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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