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를 동원하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스님은 더 이상 스님이 아니다. 불법(佛法)과 불도(佛道)를 이미 벗어났기 때문이다. 쇠파이프와 각목을 든 승려, 가사장삼(袈裟長衫)을 입고 헬멧을 쓴 승려들이 종권(宗權)을 놓고 시중의 깡패 같은 집단싸움을 벌인 30일 밤 조계종 사태의 현장을 고발하고….”
1998년 12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다. 이른바 ‘1998년 종단 사태’는 나를 포함한 종단 구성원 모두의 부끄러운 과거다. 이후 십수 년이 지났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내가 잘했다는 게 아니라 종단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상처를 언급한다.
그해 11월 예정된 총무원장 선거가 다가오면서 나의 3선(選) 여부가 논란이 됐다. 그러나 3선 논란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고, 이면에는 수십 년간 종단 분규의 원인이 됐던 종정 중심제와 총무원장 중심제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 한마디로 종단 운영의 권한과 책임을 누가 갖느냐의 문제다.
돌이켜보면 이미 분규의 조짐이 보였다. 1995년 말 당시 종정인 월하 스님이 멸빈(승가에서 영원히 추방) 상태에 있던 사제(師弟)의 사면 복권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분규가 계속되고 있고 개혁종단의 분위기를 감안할 때 당분간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월하 스님은 1997년 다시 멸빈자의 사면복권 추진과 종정 중심제로의 종헌종법 개정을 요구하지만 나는 거부했다.
이에 월하 스님이 종정 사임서를 원로회의에 제출하자 종단이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나와 원로회의 의장인 혜암 스님이 급히 종정 스님이 주석하던 통도사로 내려갔다. 3배(三拜)로 예를 올린 뒤 사임서 철회를 간곡하게 요청했지만 월하 스님은 “종정 자리가 시위소찬(尸位素餐)”이라며 거절했다. 이 말은 시동의 공짜 밥이란 뜻으로 하는 일 없이 국가의 녹을 축내는 것을 의미한다. 밖으로 나온 혜암 스님은 “이렇게까지 설득하는데 같은 말만 하신다. 이제부터 종정으로 모실 수 없다”며 화를 냈다.
원로회의는 종정 사임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고 월하 스님은 직무수행을 거부했다. 그 탓에 1998년 초파일은 종정의 봉축 법어 없이 진행했다.
오랜 인연을 맺은 종정 스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진 것은 예상 밖이었다. 1970년대 말 월하 스님과 나는 개운사 측 편에서 총무원장 중심제를 함께 지지했다.
내가 총무원장에 다시 출마한 것은 개혁종단의 성과를 유지 발전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4년의 임기 동안 제도 개혁과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속적으로 처리해야 할 개혁 과제가 많았다.
1994년 바뀐 종헌은 총무원장 임기에 관해 1차에 한해 중임(重任)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당시 법조계에 폭넓은 자문을 한 끝에 나는 1980년 10·27법난으로 강제로 물러난 데다, 1994년 이전 상황이기 때문에 제한 규정이 해당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반대 측에서는 최초 종헌 시행 이후 전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해 9월 말 실천불교전국승가회 등 14개 단체가 연합해 ‘총무원장 3선 출마 반대를 위한 범불교도연대회의’를 발족했고, 10월에는 종단 중진들을 중심으로 나를 지지하는 추대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어 그동안 종무를 거부하던 월하 스님이 “총무원장의 3선 부당, 종헌종법 개정, 모든 종도는 제2의 정화불사라는 마음으로 종단을 바로잡기 바란다”는 종정 교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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