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말 서울에 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셋째 형의 서울 집에 기거했다. 6·25전쟁은 끝났지만 도시 곳곳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 미처 복구하지 못한 건물의 잔해도 그대로였다. 먹을 것이며 입을 것이며 모든 것이 부족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지만,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던 궁핍한 시기였다.
그 시절 서울 조계사에 들렀다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그는 두 살 위였지만 내가 월반해 친구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놀랍게도 삭발하고 잿빛 가사를 입은 스님이 돼 있었다. 고향 친구이자 평생 도반으로 지낸 혜정 스님(1933∼2011)이다.
그 만남은 반가움과 놀라움이 뒤섞인, 실로 묘한 것이었다. 고향과 어린 시절, 스님의 삶 등 둘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1954년 초 혜정 스님이 수행하던 법주사로 향했다. 한 달 정도 쉬고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숨을 쉴 때마다 모든 것이 좋았다.
처음 한 달만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곳 생활이 두 달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출가하겠다고 발심(發心)했다.
얼마 뒤 셋째 형이 아버지 편지를 갖고 나를 찾아왔다. 출가하기 위해 사람을 시켜 시골집으로 증명을 떼러 보낸 통에 내가 법주사에 있다는 것이 알려진 것이다.
“불교는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다. 나라와 부모를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하고 위국위민(爲國爲民)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그것이 어렵다면 부모 곁에서 고향을 지키는 필부(匹夫)로 살기를 바란다. 매일 해가 뜨는 동창을 보며 너를 기다리겠다.”
나이 든 아버지의 편지에는 구구절절 막내아들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다시 은사인 금오 스님과 형님이 얘기를 나눴다. 은사는 다짜고짜 “동생, 데려가시오”라고 했다. 이에 형님은 “새 떼도 나무에 모였다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제 갈 길을 갑니다. 형제지만 뜻이 다른 듯합니다”고 말했다. 그랬다. 작심하고 새 세상을 찾아 떠난 나로서는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1956년 3월 지리산 화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2년 뒤 금산사에서 총무스님으로 있을 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출가한 나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어머니가 왔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30분 이상 늦게 나갔다. 기도를 하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나섰다. 오동나무 그늘에 계셨다. 어머니는 대뜸 “막둥이 보러 왔는데 왜 빨리 나오지 않았냐”고 했다. 제 아무리 큰 뜻을 품은 출가자도 어머니에게는 그냥 막둥이였다. 어머니는 하루 저녁 주무시고 가셨다.
몇 년 뒤 교편을 잡고 있던 넷째 형이 찾아왔다. 당시 나는 화엄사에서 교무스님으로 주지인 은사를 모시고 있었다.
은사는 이번에도 “데려가시오”라고 했다. 형님은 “제갈공명은 민심수습과 치국평천하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그 형인 제갈근은 누에를 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고향을 지키며 부모님을 돌보는 것이 제 길이고, 동생의 길은 따로 있습니다”고 했다. 그 넷째 형은 뒤늦게 한학을 배워 아버지를 즐겁게 했고, 형제 중 줄곧 부모 곁을 지키며 살았다.
은사의 입버릇인 ‘데려가시오’는 일종의 시험이었다. 계속 수행할 근기가 없다면 포기하는 것이 낫다는 의미다. 그러나 은사는 수행에는 엄격했지만 제자들이 잠시 다른 곳에 가게 되면 눈물을 보일 정도로 속정이 많은 분이었다.
어머니는 나중 일심화(一心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매년 부처님오신날이면 금산사에 오셨다. 훗날 나이가 들어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를 잘 모시려고 노력했다. 나의 뜻이 세속의 정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굳어지기도 했고, 출가를 이유로 부모를 몰라라 하는 것도 사람의 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한데, 젊은 시절 왜 어머니가 보고 싶지 않았으랴.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42>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월산 범행 탄성 혜정 월서 월탄 등 종단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형제간에 대해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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