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43>새롭게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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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0일 03시 00분


<185>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세계영성지도자대회에서 연설하는 송월주 스님. 1982년부터 약 3년간 외국에 머물던 스님은 “새로운 세계를 보면서 불교를 포함한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송월주 스님 제공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열린 세계영성지도자대회에서 연설하는 송월주 스님. 1982년부터 약 3년간 외국에 머물던 스님은 “새로운 세계를 보면서 불교를 포함한 종교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성찰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송월주 스님 제공
1982년 10월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리 수행자라고 해도 1980년 10·27 법난 뒤 1년 동안은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출가한 뒤 처음으로 종단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 포부를 펴려고 했지만 타의에 의해 7개월 만에 물러났으니 그 상처를 달랠 길이 없었다. 법난 과정에서 개인적인 불명예뿐 아니라 전체 불교계가 비리의 온상으로 치부됐다. 사필귀정으로 당시 발표가 허위였음이 속속 드러났지만 불교계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은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니 법난의 상처들이 기억 속에는 있으되 그 미움은 엷어졌다. 혜정 스님의 제자이자 조카 상좌인 지명 스님의 초청으로 미국행을 결심했다. 어차피 총무원장에서 내쫓기면서 2년간 공적인 일을 맡지 못하게 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JP(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말처럼 자의 반 타의 반 떠난 길이었는데 예상보다 길어져 3년 가깝게 해외에서 지낸다.

당시 미국에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등에 한국 사찰 100여 곳이 있었다. 숭산, 법안, 도안 스님과 같은 분들이 교포들을 상대로 포교를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그곳 사찰들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순회하며 200여 회의 법문을 했다. 지명 스님이 있던 로스앤젤레스 반야사에서는 회주를 맡았다. 그곳을 중심으로 설법도 하고, 교포 가정을 방문해 신앙상담도 했다. 내친 김에 캐나다와 남미를 두루 돌며 설법 여행을 하기도 했다.

1984년 6월에는 유럽 여행을 떠났다. 영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이탈리아, 네덜란드, 모나코 등지를 돌며 각국 문화와 생활상을 살펴봤다. 그해 말에는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스리랑카, 대만 등의 불교성지를 순례하고 일본 불교계도 둘러봤다. 긴 여행 끝에 1985년 봄, 그리운 고국 땅으로 돌아왔다.

이 시간 동안 나는 자신의 내면은 물론이고 해외 문명과 불교를 살필 수 있었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본 한국 불교와 조국은 생각보다 작고, 안타깝게도 초라했다. 우리 불교는 전통적으로 참선 위주의 수행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왔다. 맞는 얘기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세상과 떨어져 있는 ‘초세간(超世間)’주의에 빠져 대중의 고통과 멀리해 왔다는 아픈 현실이 눈에 들어 왔다. 제대로 된 수행 전통의 부족과 대처(帶妻)를 이유로 얕잡아 보던 일본 불교조차도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오랜 시간 관계를 맺는 생활 불교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걸음마 단계에 있던 미국 내 불교 사찰들도 끊임없이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반면 우리 불교는 산중에 머문 채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명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지나친 풍요와 물신화는 문제였지만 무질서한 속에서도 분명한 룰이 존재했다. 어떤 모임에 가도 대가 없이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고, 주장이 달라도 법의 틀을 지키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가치가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

광활한 세계를 돌며 이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별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인연을 기다리는 안목과 여유도 갖게 됐다. 출가한 뒤 30년 가깝게 종단 일에 쫓겨 자신을 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해외에서의 3년은 내게 아주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시간을 쪼개 매일 화두를 들었고, 경전을 포함해 300여 권의 책을 정독했다. 출가 초기를 빼면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였다.

돌이켜 보면 정화운동과 종단 개혁에 참여하면서 그 성과와는 별도로 마음의 상처도 깊었고 아픔도 컸다. 나는 상처받은 내면을 치유하면서 성숙해졌고, 기다림의 지혜도 얻었다. 종단 중흥과 개혁을 향한 나의 신념이나 원력은 큰 변화가 없지만 사물을 보는 눈과 추진하는 자세에는 차이가 생긴 것이다.

갑자기 주어진 ‘삶의 쉼표’, 그것은 이후 깨달음의 사회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큰 힘을 주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44>회부터 송월주 스님은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한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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