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53>회고록을 끝내며

  • Array
  • 입력 2012년 1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195>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60년 가까운 승가생활의 고향인 전북 김제시 금산사에 선 송월주 스님. 사회와 지구촌의 그늘진 곳을 찾아 진정한 공생을 실현하는 것이 스님의 꿈이다. 송월주 스님 제공
60년 가까운 승가생활의 고향인 전북 김제시 금산사에 선 송월주 스님. 사회와 지구촌의 그늘진 곳을 찾아 진정한 공생을 실현하는 것이 스님의 꿈이다. 송월주 스님 제공
혹자는 나의 삶을 ‘진흙탕의 길’로 부른다.

불교정화운동과 종단 개혁 과정에서 숱하게 세속적 환경과 부대끼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때로 대처승들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고, 1980년에는 총무원장으로 종단 개혁에 나섰다 신군부에 의해 법난(法難)을 겪었다. 어느 때는 폭력사태로 번져 국민적 분노를 산 종단 갈등의 한 당사자가 됐다.

부모의 연(緣)까지 애써 외면한 출가자가 어찌 깨달음에 목마르지 않을까. 그러나 60년 가까운 승가 생활에서 얻은 것은 ‘깨달음과 이를 실천하는 것은 하나’라는 것이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는 “번뇌가 없으면 보리(菩提·깨달음)도 없고, 보리가 없으면 번뇌도 없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에 출가한 도반들 역시 자신들의 길을 걸었다. 숭산 스님의 길은 국제포교, 광덕 스님은 도심포교, 법정 스님은 수행과 저술이었다.

나의 길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1994년 제28대 총무원장으로 선출되면서 80년 법난으로 좌절한 개혁을 실현할 기회를 가졌다. 나의 원력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다. ‘불교가 더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부대중의 염원이 개혁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불국사 회주인 성타 스님은 개혁 종단의 포교원장으로 포교 조직을 바꾸고 교수불자 모임을 만드는 등 포교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통도사 주지인 원산 스님은 교육원장으로 제대로 된 승가교육의 씨앗을 뿌렸고, 현 교육원장인 현응 스님은 기획실장으로 종단 개혁을 뒷받침했다.

금산사는 나의 승가 인생에서 고향이나 다름없다. 속가와 지척의 거리에 있기도 하지만 26세에 주지를 맡은 이후 이곳에서 줄곧 꿈을 키웠다. 서기 599년 창건된 금산사는 3층 전각 높이의 미륵부처를 모신 미륵신앙의 성지다. 주지 부임 이후 미륵전 해체 보수와 대적광전 복원, 전각의 신축 등을 통해 과거 융성했던 천년 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삶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미륵전의 부처를 떠올렸다. 다른 부처들과 달리 우뚝 선 채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 부처의 염원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1998년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 국제개발구호 비정부기구(NGO)인 지구촌공생회를 창립하는 등 사회운동에 주력했다. 이제는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내게는 ‘제2의 출가’였다. ‘나’의 좁은 우물을 벗어나 모든 이가 함께 나눌 수 있는 큰 우물을 만들어야 한다.

사찰의 아침 예불에 5가지의 잊지 말아야 할 큰 은혜라는 말이 나온다. 국가(국왕)의 은혜, 부모의 은혜, 스승의 은혜, 베푸는 이의 은혜, 좋은 벗의 은혜를 알라는 것이다. 어찌 그 다섯뿐이겠는가. 국민의 은혜, 땅의 은혜, 물의 은혜, 바람의 은혜, 불의 은혜…. 모두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것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 하나 잘난,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다는 당연한 도리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여생의 소망은 몸담고 있는 종단, 그리고 민족과 사회, 더 나아가 지구촌의 인류를 위해 대중과 함께하는 자세로, 심부름하는 자세로 살겠다는 것뿐이다. 소임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 출가자로서의 한결 같은 소망이자 소신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가피(加被·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를 받으며 살아온 승가생활을 사회에 회향하는 길이다.

이 글을 통해 다시 만난 분들의 얼굴과 사연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미처 못 다한 얘기나 섭섭한 구석도 있을 것이다. 불교, 나아가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한다는 취지에서 나의 속살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니 넓은 이해를 바란다. 끝까지 회고록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한다.

나의 수행 현장과 염화실(拈花室·조실이나 방장스님이 거처하는 방)은 사회와 지구촌의 구석진 곳이다. 나는 늘 그곳에 서 있을 것이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