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씨 “16세기 숙희도 결손가정 소녀… 공부로 새 삶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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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0일 03시 00분


■ 안양소년원서 강연

공부하는 삶을 택함으로써 자기실현을 이뤘던 16세기 여성 이숙희의 이야기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해은 선임연구원이 19일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원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안양=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공부하는 삶을 택함으로써 자기실현을 이뤘던 16세기 여성 이숙희의 이야기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해은 선임연구원이 19일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원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안양=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여자에게 공부가 권장되지 않던 시절, 숙희는 왜 공부를 이렇게 열심히 하려 했을까요?”

19일 오후 4시 경기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안양소년원) 강당.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은 선임연구원(47)은 한때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정규학교 대신에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14∼19세 여학생 130여 명에게 ‘조선시대 공부하는 소녀, 숙희 이야기’를 들려줬다.

조선시대 인물의 모습을 새로 발굴해내는 것은 지금까지 주로 유명한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하지만 정 연구원은 강연을 들을 아이들과 연령대나 처한 환경이 비슷한 ‘숙희’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찾아낸 곳은 조선 개국공신의 한 사람인 이직의 5대손인 이문건의 문집 ‘묵재일기’. 숙희는 이문건의 손녀딸이다.

숙희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지 않았다. 숙희가 태어났던 1547년에 할아버지인 이문건은 을사사화로 경북 성주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이온은 어릴 때 열병을 앓아 지능이 떨어졌고, 집안에서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머니 김종금은 이런 남편 때문에 노비들에게 무시를 당할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결국 이온은 숙희가 11세 때 죽고, 숙희는 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게 된다. 지금의 한부모가정 아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셈이다.

손자를 원했던 할아버지는 여자들은 길쌈만 배우기를 바랐지만 숙희는 언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자극받아 할아버지에게 글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이후 남자들만 거주하는 상당(上堂)에 자주 온다고 꾸지람을 들어가면서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아 6세 때 언문을 시작해 시집을 간 15세에는 ‘소학’까지 배웠다.

결국 할아버지도 손녀의 열정에 손을 들고 말았다. 숙희의 남동생 숙실에게 소학을 가르치는 임무를 숙희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문건은 손녀의 행동을 기특하게 여겨 문집 곳곳에 “여손에게 글을 가르쳤다. 배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숙희 아기가 날마다 와서 ‘삼강행실도’를 배운다” 같은 글을 남겼다. 숙희의 일생에 대해 문집에는 20세에 둘째 딸을 낳은 얘기까지만 나온다.

정 연구원은 “숙희는 어려운 환경에서 스스로 공부를 택함으로써 작게는 할아버지, 크게는 사회로부터 나름대로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강연을 들은 김경희(가명·15) 양은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인정받기 위해 좀 더 진지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말했다. 이가연(가명·18) 양은 “사고를 깊게 하고 긍정적으로 살아야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연구원은 “삶에 상처를 입은 여학생들에게 공부가 왜 필요한지 숙희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들려주고 싶었다”며 “왜 공부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남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최하는 한국학 대중화 프로그램 ‘미루(美樓)’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안양=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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