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지난 지금도 ‘기자정신’의 푯대로… 정신영 본보기자 50주기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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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4일 03시 00분


“그를 통해 관훈클럽 자리잡아”

1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신영기금회관에서 열린 정신영 기자 50주기 추모 모임에서
문창극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장(마이크를 든 이)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은 신영연구기금을 통해 동생이 언론계에 영원히 남아 등불이 돼주기를 바랐다”고 말
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1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신영기금회관에서 열린 정신영 기자 50주기 추모 모임에서 문창극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장(마이크를 든 이)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은 신영연구기금을 통해 동생이 언론계에 영원히 남아 등불이 돼주기를 바랐다”고 말 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동아일보 국회출입 기자, 유럽 특파원 등으로 활약했던 정신영 기자(1931∼1962·사진)의 50주기 추모 모임이 13일 서울 종로구 관훈동 신영기금회관에서 열렸다.

정 기자는 ‘기자 정신’의 푯대였다. 그는 독일 분단 직후 긴박한 상황 속에서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동베를린에 잠입했다. 1961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 1면은 정 특파원이 취재한 동베를린 소식을 전했다. 이후 두 차례나 더 위험을 무릅쓰고 동서독 단절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도했다.

한국 언론사에 남을 기사를 썼던 그는 이듬해 봄 유학 중이던 독일 함부르크에서 32세의 젊은 나이에 장 폐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형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동생의 못다 한 뜻을 잇기 위해 1977년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에 기금 1억 원을 기탁해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이 탄생했다.

문창극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이사장은 “선배 언론인인 고인의 얼굴도 보지 못한 이들이 이 자리에 함께 모인 것은 그를 통해 관훈클럽이 자리 잡았고, 고인의 뜻을 따라 올바른 저널리즘을 각자 자리에서 이루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추모했다. 김민배 관훈클럽 총무는 “고인은 한국 언론의 토양을 일궜다. 그 정신을 어떻게 이어갈지 마음속에 깊이 새기게 된다”고 말했다.

조용중 전 연합통신 사장은 고인이 아내인 장정자 씨와 연애하던 시절에 쓴 10장 분량의 편지를 소개했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기자 정신영과 관훈클럽’이라는 주제로 과거 고인의 사진과 친필 편지, 동료 기자들과 은사들의 편지, 고인이 송고한 기사 등을 선보였다. 1957년 고인의 서울대 대학원 졸업식 때 형인 정주영 회장 부부와 촬영한 사진, 관훈클럽 서른 번째 회원으로 입회한 기록,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서독 경제상을 취재하는 모습 등이 스크린에 비쳤다.

고인의 아들인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은 “오랜 시간 동안 선친을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다. 선친의 못다 이룬 꿈이 담긴 신영연구기금이 계속 유지되고 발전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날 추모 모임에는 유족과 관훈클럽 회원 등 90여 명이 참석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정신영#정신영50주기#관훈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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