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서울 구로구 고척동에 있는 경인고 구내식당 앞에 팻말을 든 학생들이 나타났다. 점심식사를 하러 온 학생 몇 명이 그걸 보고는 꼬깃꼬깃한 1000원권 지폐를 꺼내기 시작했다. 뒤이어 도착한 학생들도 하나 둘 주머니를 뒤졌다. 팻말에는 ‘사랑이 넘치는 학교 심장병 수술 친구를 도웁시다’라고 쓰여 있었다. 어느덧 모금함 주변은 학생 100여 명으로 붐볐다.
학생들이 간식 값, 학용품 값을 아껴 도우려는 친구는 이 학교 특수반 3학년 임모 양(20)이다. 임 양은 지적장애(2급)에 선천적 심장병까지 겹쳐 생후 8개월부터 여러 번 심장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 1월 심장이식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투병 중이다. 문제는 2억2000만 원이나 되는 수술비. 기초생활수급자인 임 양 부모는 주변에서 돈을 빌려 4900만 원을 마련했지만 나머지는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런 처지를 알게 된 임 양의 친구들이 모금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임 양은 허약한 건강과 지적장애 때문에 그동안 주로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받았다. 2010년 가을, 일반인 학생이 대다수인 이 학교로 전학 오면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주변에서 우려가 많았다. 하지만 임 양은 특유의 적극성으로 스스럼없이 친구를 사귀었다. 2학년 때 짝꿍이었던 김한솔 양(18)은 “몸이 불편한데도 열심히 수업을 듣고 쉬는 시간엔 취미인 일본어 공부까지 하는 걸 보고 그 부지런함에 놀랐다”며 “많은 가르침을 준 친구에게 작은 힘이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임 양이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데는 일반학급과 특수학급을 통합 운영한 덕이 컸다. 비장애인인 학생들이 장애인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법을 가르치자는 취지다. 이번 모금운동을 주도한 친구들도 대부분 일반 학급 학생들이다. 친구 양주원 양(18)은 “많이 불편한 아이라 친해지기가 어려울 것 같았는데 일기도 같이 쓰면서 선입견이 사라졌다”며 임 양이 손수 만들어 선물해줬다는 ‘입술 보습제’를 보여주기도 했다.
학생들이 임 양을 위한 모금운동을 결심한 건 공교롭게도 정부의 학교폭력 전수조사 결과가 나온 19일이었다. 교실이 폭력과 왕따로 가득한 ‘정글’로 변해 간다는 어른들의 우려와 달리 이 학교에선 뜨거운 우정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쁨 양(18)은 “한 친구가 폭력을 행사했을 때 주변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맞장구를 치니까 가해 학생이 우월감을 느끼는 게 문제”라며 “어른들이 해줘야 할 일도 많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현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모금 운동을 알리고 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인근 학교 학생들도 동참 의사를 밝혔다. 이 학교 특수교육 교사인 이의선 씨는 “학생들이 갈수록 폭력적이 된다고 하지만 본래의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는 게 교사들의 몫”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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