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때문인지, 지긋지긋하게 붙어있는 눈 위 혹 때문인지 곧 헤어져야 하는 남편 모습은 희미하게 보였다. 하지만 ‘꼭 한국 주민등록증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또렷해졌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을 떠나 라오스 국경을 넘어 한국행에 성공한 이운심(가명·25·여) 씨의 3월 초 모습이다.
○ 장마당 할머니와 중국인 남편
“나이도 어린데 왜 여기서 고생을 해….”
2008년 함경북도 청진. 이름 모를 할머니가 이 씨에게 말을 걸었다. 장마당에서 종종 보던 할머니는 젊은 여성에게만 접근했다. 탈북을 도와 성공하면 여성들을 중국에 있는 조선족이나 한족(漢族) 남성에게 소개해 주는 브로커였다. 그 사실을 알았지만 이 씨는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이 씨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난 뒤 강냉이를 빻아 넣고 끓인 희멀건 죽만 먹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집으로 들어온 양아버지는 매일 그를 때렸다. 오른쪽 이마가 푹 꺼졌다. 하도 맞아서 뼈가 주저앉은 것.
2008년 두만강을 넘었다. 조선족 안내로 지린(吉林) 성 옌지(延吉)에 도착했다. 열흘째 되던 날 중국인이 찾아와 버스에 그를 태웠다. 한나절이 걸려 도착한 곳은 하얼빈. 여기서 벼농사를 짓는 중국인 남편과 선을 봤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바로 결혼했다.
○ 북송 공포 속 희망은 주민등록증
다행히 여섯 살 위 남편은 마음이 따뜻했다. 손짓 발짓으로 말했다. 마음이 열렸다. 2010년에는 아들도 낳았다.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행복은 짧았다. 김정일이 죽자 중국 당국이 나서 탈북자를 대대적으로 적발해 북송(北送) 시켰다. 북한으로 끌려가면 가족과는 생이별할 게 뻔했다. 한국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강제 북송될 염려는 없을 텐데…. 가족을 영영 못 볼 일도 없을 텐데…. 남편을 설득해 홀로 남한행을 결심했다.
중국과 라오스 국경을 가로지른 산기슭은 조각 빛 하나 없는 암흑. 국경 검문소를 피해 4시간 동안 정신없이 숲길을 걸어야 했다.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에서 난 붉은 피와 눈물, 땀과 먼지가 뺨 위에서 뒤범벅이 됐다. 새벽이 밝아올 때 라오스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소식을 듣고 도움을 주기 위해 달려온 박선영 당시 선진통일당 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의원의 도움으로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다. 5월 한국에 도착했다. 꿈에 그리던 주민등록증도 받았다.
지난달 하나원에서 나온 그는 돈을 벌기로 했다.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올 생각에서다. 하지만 사는 게 고된 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심하게 맞은 뒤부터 눈꺼풀이 혹처럼 자라나더니 이제는 얼굴을 덮는 상태가 됐다. 신경세포 끝에 혹이 자라는 병이다. 눈꺼풀은 폭 2cm, 길이 6cm가량으로 자라 광대뼈까지 덮었다. 그런 외모의 이 씨를 채용하려는 회사는 없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는 ‘희망’과 ‘온정’이 있었다.
박 전 의원과 북한인권의사회 회장으로 있는 박종훈 고려대 의료원 교수가 발 벗고 나섰다. 22일에는 고려대 안암병원에서 염원하던 혹제거 수술을 무료로 받는다. 이 씨는 13일 “수술 뒤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열심히 일해 잠시 두고 온 아들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