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8일 정오 미국 뉴욕 동북부에 위치한 퀸스칼리지 음대 앞. 색소폰 가방을 멘 장년의 남자가 음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한국 재즈 2세대 연주자인 정성조 씨(67)였다.
그가 교수 아닌 학생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원장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정 씨는 그보다 40년은 어려 보이는 희거나 검은 피부의 학생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연습실로 들어갔다. 테너 색소폰을 꺼내 유려한 즉흥연주로 입을 푼 정 씨는 원장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2011년까지 서울예대 실용음악학과장을 맡아 ‘스승 중의 스승’ 역할을 해 온 그는 그해 8월 정년퇴임과 함께 미국 뉴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시 학생으로 ‘백의종군’한 것. 가장 먼저 그를 말린 이는 서울예대 제자들이었다. “선생님께서 뭘 더 배울 게 있다고 만리 길을 가십니까.”
정 씨는 국내 대중음악계의 산증인이다. 서울중학교 재학 시절 관악단 연주자로 색소폰을 잡은 그는 서울고 2학년 때 미8군 악단에 들어갔고 작곡가 고(故) 길옥윤 씨 밑에서 연주 인생을 시작했다. 지휘자 금난새와 서울대 작곡과 66학번 동기생으로 1973년부터 국내 최초의 브라스 록 그룹인 정성조와 메신저스를 만들어 활동했다. 1979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 버클리 음대에 입학했다. ‘영자의 전성시대’ ‘깊고 푸른 밤’ 같은 흥행 영화의 작곡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정수라가 부른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곡(‘난 너에게’)도 그의 작품. 국내 방송음악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고 느낀 그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KBS 관현악단장을 맡아 ‘열린음악회’ ‘빅쇼’ 음악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2005년부터는 실용음악과 창립(1989년) 멤버로 교편을 잡았던 서울예대로 돌아가 실용음악학과장을 맡았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입학한 퀸스칼리지에서 사사한 음악대학원장은 정 씨보다 한참 ‘동생’인 50대 음악인 마이클 필립 모스먼. 디지 길레스피, 호레이스 실버 같은 재즈 거장과 협업해 온 베테랑 뮤지션인 모스먼에게 정 씨는 빅밴드 지휘와 편곡부터, 중학생 때부터 잡아온 테너 색소폰 연주까지 다시 배웠다. “여기서 유학했던 아들(재즈 트롬보니스트 정중화)을 보러 왔다 만난 모스먼이 스승으로서 너무 탐났습니다.”(정성조) 모스먼 원장은 “더 가르칠 게 없는 경지에 오른 연주자가 배우겠다고 찾아와 내가 더 황송했다. 그의 열정에 한 번, 경력과 실력에 또 한 번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6일 졸업연주회에서 ‘강강술래’의 재즈 버전을 만들어 무대에 섰다는 정 씨는 퀸스에서의 세 학기 동안 학생뿐 아니라 교사로서의 자세도 다시 배웠다고. “하루는 모스먼 교수가 아침 일찍 나와 도넛을 테이블에 깔고 있었죠. ‘그런 건 학생들 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일찍 나오는 젊은 연주인들을 기분 좋게 하려는 것일 뿐’이라고 답하더군요!”
67세의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2일 귀국한 정 씨는 ‘숙제’가 남았다고 했다. 석사학위까지 받았으면 끝난 것 아닌가. “라이브 연주야말로 음악인의 과제잖아요.” 그는 5일 서울 대학로 ‘천년동안도’, 11일 ‘청담동 원스 인 어 블루문’ 무대를 시작으로 중학교 때부터 들었던 색소폰을 잡고 클럽 무대에 다시 오른다. 뉴욕에서 녹음해온 빅밴드 연주도 다듬어 상반기 중 음반으로 낼 계획이다.
뉴욕에서 1년 반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배워 왔다는 정 씨에게 물었다. 배운 것, 이제 어디다 써먹을 거냐고. “…글쎄요. 아직 생각 못해 봤는데, 허허. 말할 수 없이 큰 것은 배우는 즐거움, 그 자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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