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납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광복단을 조직하고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1890∼1923)는 1922년 11월 중국 상하이(上海)를 떠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동지들에게 이 말을 남겼다. 권총 4정과 탄환 800발, 그리고 일생일대의 의거 계획을 가슴에 품은 채였다.
1923년 1월 22일 이른 아침 서울 종로구 효제동 일대에서 무장한 일본 경찰 1000여 명이 3시간 동안 총격전을 치렀다. 일본 경찰들의 표적은 김 의사 단 한 명뿐이었다. 김 의사는 이미 열흘 전 독립운동 탄압의 본거지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10여 명에게 중상을 입히고, 닷새 전에는 삼판동(지금의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서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4명을 살상했다. 김 의사는 이날 홀로 일본 경찰 1000여 명과 대치하며 16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자신도 이미 10발의 총탄을 맞은 상태였다. 김 의사는 마지막 탄환을 자신의 머리에 쏘아 장렬히 자결했다. 만 33세의 나이였다.
당시 일제는 이 사건에 대한 보도를 금지했으나 동아일보는 기사는 물론 호외를 발행해 김 의사의 활동상을 수차례 보도하고 사건을 널리 알렸다. 그해 3월 15일 발행된 호외에는 김 의사의 최후의 순간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숨이 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
김상옥 의사의 시가전과 순국 90주년을 맞아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효제초등학교 내 순국선열김상옥체육관에서 ‘김상옥 의사 일제하 서울시가전 승리 9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김상옥·나석주의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하고 동아일보사 국가보훈처 광복회 한국독립동지회 KBS가 후원한 행사에는 이한동 기념사업회 회장, 이홍환 기념사업회 부회장, 박유철 광복회장, 유족 등 300여 명이 참석해 김 의사의 의거를 기렸다. 이 회장은 대회사에서 “김상옥 의사는 청소년에게 큰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며 “나라를 향한 충성심과 희생정신, 불의에 항거하는 의협심을 높이 받들고 선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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