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드월러더 씨는 1953년 5월부터 1년간 경기 수원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에서 근무하던 중 심한 화상을 입고 어머니와 함께 부대를 찾은 한국인 소녀(당시 12세)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그는 상부에 요청해 소녀를 헬기에 태워 부산의 미 육군이동외과병원(MASH)으로 보냈고, 몇 달 뒤 거의 완치된 소녀와 재회한 뒤 헤어졌다.
이후로도 소녀와의 소중한 인연을 잊지 못한 그는 지난달 국가보훈처에 사연을 담은 영상편지를 보냈다. 소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전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으니 찾아 달라는 간곡한 호소였다.
이에 보훈처는 ‘화상소녀 찾기 캠페인’을 벌였고, 최근 한 통의 제보 전화를 받았다. 경기 수원시 매향리 인근 마을에서 ‘화상 소녀’의 이웃집에 살았던 한동학 씨(66·서울 동대문구)가 본보에 실린 캐드월러더 씨의 사연을 보고 6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낸 것이다. 보훈처는 한 씨를 통해 ‘화상 소녀’가 경기 화성시 우정읍 운평2리에 거주하는 김연순 씨(72)임을 확인했다.
한 씨는 “기사를 보고 대번에 그 누님이라는 생각이 들어 친인척 등을 통해 추가로 알아보고 보훈처에 알려줬다”고 말했다. 한 씨는 “당시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화상을 입은 누님 집을 찾았는데 아주머니가 대접한 삶은 달걀을 먹고 가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이를 토대로 보훈처는 캐드월러더 씨가 근무한 부대가 있던 매향리 인근 마을의 방문 조사와 주민 면담을 거쳐 김 씨를 찾아냈다. 김 씨는 “부산에서 치료를 받다 서울의 한 병원으로 옮긴 뒤 캐드월러더 씨가 매주 과자를 갖고 찾아와 그분이 오는 날만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입원비와 치료비 등을 고민하지 않았고, 캐드월러더 씨가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며 “당시 그를 ‘미국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김 씨를 찾는 과정에서 캐드월러더 씨와 김 씨의 통역을 맡았던 백완기 씨(74)의 제보도 크게 기여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백 씨는 “당시 김 씨의 어머니가 캐드월러더 씨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큰 암탉을 부대로 가져갔는데 ‘미군은 살아 있는 닭은 먹지 않는다’고 통역을 해 돌려보내기도 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현재 미국 애리조나 주에 거주하는 캐드월러더 씨는 “60년간 애타게 그리워하고 찾고자 했던 소녀를 한국 정부가 이렇게 빨리 찾아줘 무척 놀랍고, 대단히 감사하다”고 밝혔다고 보훈처는 전했다.
보훈처는 유엔 참전용사 초청행사의 일환으로 다음 달 캐드월러더 씨 부부를 초청해 김 씨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21개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와 함께 ‘60년 전 한국과의 인연 찾기 캠페인’을 전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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