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모두 이방인이었다. 1995년과 2002년 각자 고향을 떠나 이 땅에 첫발을 들였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필리핀 새댁’, 말투가 낯선 ‘북한에서 온 여자’로 불렸다. 세월이 흘렀다. 한국생활 18년 차와 11년 차. 이젠 이름만 말해도 알아보는 이가 많다.
다문화 국회의원 1호인 이자스민 새누리당 의원(36)과 남북한 한의사 1호인 김지은 진한의원 원장(47). 두 사람이 동아일보 창간 93주년 기획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다. 추천위원들은 다문화 인구 130만 명, 새터민 2만5000명 시대에 두 사람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소수자로 한국 사회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던 이 의원과 김 원장.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 난 한국 아줌마인데, 보는 눈길은…
이 의원은 올해부터 필리핀 생활보다 한국 거주 기간이 더 길어졌다. 학원(사교육) 문화는 안 따라가겠다고 다짐했지만 학교 임원을 하면 1점 더 준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한국 엄마. 김 원장도 마찬가지다. “이젠 북한에서 쓰는 단어를 들으면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하는, 그런 느낌이 나요.”
스스로를 이방인이라고 생각해 움찔할 때가 가끔 있다. 이렇게 만드는 건 같은 한국 사람들이다. 이 의원은 2010년 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직후 “언제 돌아가느냐”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서 들었다. 충격이었다. “15년의 내 인생이 다 여기에 있는데, 내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난 한국 사람인데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느냐고 따지고 싶었는데 서러워만 할 뿐 말도 못했어요.”
김 원장이 맞장구친다. 북한에서 이혼했다고 밝히면 “에이, 거짓말”이라는 반응이 되돌아왔다. 북한에선 그럴 수가 없다는 식이다. 살아 보지도 않은 이들이 이렇게 나오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쉽지는 않지만 북한에도 이혼은 있다. “제가 기쁨조를 하다가 밀려나서 도망쳐 온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을 원하는 건가….” 차분하던 김 원장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의원은 국회의원으로 유명해졌는데도 시선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고개를 젓는다. 얼마 전 축사 요청을 받아 행사에 참석했는데 주최 측 인사들이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자신을 좋지 않게 얘기하더란다. 한국어를 못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까지 올려놓고 한국말도 못 할까 봐. 열이 나서 ‘한국말, 필리핀말, 영어 다 해요. 뭘로 할까요? 스페인어도 합니다’라고 쏘아붙였어요.”
이 의원은 국회의원 대접도 받지 못하는 편이다. “권력을 지닌 사람들한테는 공손하게 ‘안녕하세요’ 하잖아요. 하지만 저를 처음 봤을 때는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떨어지지 않아요. 얘기를 오래 해야 점점 허리가 숙여지죠.” 이 의원은 이런 고정관념을 깨려면 사람을 많이 만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사라는 행사는 다 다닌다.
▼ “다문화 2세들 위해… 공존 한국의 꿈, 결코 포기 못해요” ▼
■ 이자스민 의원-김지은 원장 희망 토크
○ 가급적 허리를 더 숙여야
요즘은 초등학생도 다문화라는 말을 안다. 한국 사회의 외연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도 한다. 하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다.
이 의원은 4대가 함께 사는 집의 며느리다. 이를 보고 옆집 아주머니가 “요즘엔 외국 며느리가 좋아. 애들한테 이중언어를 가르치고, 시부모도 잘 모시잖아”라고 말했다. 이 의원이 농담 삼아 물었다. “막내아들 배필로 어느 나라 아가씨 소개해 드릴까요. 말씀만 하세요.”
칭찬 일색이던 아주머니는 이내 “아휴, 아니야. 내 아들은 한국 여자와 결혼시킬 거야”라며 손사래를 쳤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 된다? 이 의원이 절감한 한국 다문화의 현주소였다.
두 사람은 결혼이주여성과 새터민 사이에서 ‘희망 아이콘’이 됐지만 뜻밖의 상처를 줄까 봐 오히려 몸가짐을 더 조심스럽게 할 때가 적지 않다.
이 의원은 방송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촬영장에 끌고 와서는 “봐, 너랑 같은 필리핀 사람인데 이 언니는 한국말 잘하잖아”라고 꾸짖더란다. 이 일로 이 의원은 다문화 여성에 대한 낮은 기대치를 높이는 자신이 비교 잣대로 바뀌면서 동료 이주 여성에게 더 큰 스트레스를 주지나 않을까 늘 돌아보게 됐다.
김 원장은 북한 청진의대를 졸업하고 8년간 한의사로 일했다. 한국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의대 정규 과정을 다시 밟아 2009년 자격증을 땄다. 정말 어렵게 이뤄 낸 성취였지만 새터민 앞에선 잘 밝히지 않는다. “모든 새터민이 꿈을 갖고 한국에 와요. 그들이 얼마나 피땀 흘리며 애쓰는지 아는데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됐어’라고 감히 말 못 해요.”
○ 우리가 만드는 10년 뒤 희망
두 사람은 편견과 공격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순간이 없지 않았다. 유서를 쓴 적까지 있다. 두 사람은 그런 순간 되레 한국을 끌어안았다.
김 원장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국에서 가장 낯선 게 명함 문화였어요. 언제 식사 한번 하자는데 연락이 안 오더라고요. 처음엔 새터민이라고 무시하나 싶었는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한국 사람과 멀어지잖아요.” 그는 하루에 받은 명함을 죽 펼쳐 놓고 먼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 고마운 자리였다. 많이 배웠다’라고. 또 사람을 만날 때면 항상 웃었다. 그랬더니 무척 편하게들 생각하는 것을 느꼈다. 그 덕분에 지금은 부르면 와르르 쏟아져 나올 만큼 친구가 많아졌다.
이 의원에게는 필리핀의 여유와 낙천성이 보탬이 됐다. “점심때, 한국 시어머니와 필리핀 엄마가 냉장고 문을 동시에 연다고 해 보세요. 아무것도 없으면 시어머니는 어떡하느냐면서 걱정해요. 친정 엄마는 점심을 제치고 저녁을 먹자고 하죠.” 이 의원은 지난해 외국인은 떠나라는 공격을 받고도 꿋꿋했던 친정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아직 할 일이 더 많다고 강조한다. 자신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년 뒤 다문화가정이나 새터민을 보는 눈이 달라질 테니까.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설움을 아이들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다.
희망은 없지 않다. 이 의원의 아들 승근 군(17)이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역시 다문화가정 애들이 다 예쁘고 잘생겼어. 나도 외국인과 결혼해야지, 2세를 위해서.” 다문화가정 행사에 다녀온 뒤의 소감이었다. 승근 군은 혼혈이 예쁘니까 앞으로 방송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대부분 다문화가정에서 나올 것이라고도 했다. 이 의원은 그런 아들에게 “이미 섞여 있어”라고 말해 줬다.
김 원장은 2년 전 탈북한 아들 혁진 씨(21)와 14년 만에 재회했다. 아들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민족은 백의민족인데 어떻게 외국인과 함께 사느냐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나중에 아들이 결혼한다고 할 때 누굴 데려오든지 모든 조건을 갖출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10년 뒤 한국 사회가 함께 사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혁진이가 살 사회는 경쟁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꼴찌에게도 박수쳐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남매를 둔 이 의원이 맞장구친다. “치열하게 경쟁하다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과정에서는 똑같이 경쟁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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