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홀몸노인 위해 써달라” 29억 익명기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24일 03시 00분


“의대진학때 받은 은혜 갚고 싶었다” 88세 재일교포 학자 사연과 함께 송금
공동모금회 익명기부로는 최대액수

“가족의 돌봄 없이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고국의 노인들을 도와주세요.”

22일 서울 중구 정동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일본어로 적은 3장의 편지가 팩스로 전달됐다. 이 편지에는 88세 재일교포 학자라고 밝힌 익명의 기부자가 자신의 사연과 함께 한국의 저소득층 홀몸노인을 위해 써 달라며 245만 호주달러(약 29억1400만 원)를 공동모금회 기부계좌로 송금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액수는 개인이 공동모금회에 익명으로 기부한 최대 액수다.

편지에는 “남을 돕는 것은 원래 조용하게 하는 것”이라는 내용도 덧붙여 있었다. 공동모금회는 이름과 얼굴을 알리길 권했지만 그는 끝내 거절했다. 편지에 따르면 익명의 기부자는 1925년 평안북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중국 칭다오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일본에서 지내 왔다. 그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에 남겨진 가족과 연락이 끊겼다. 그때부터 교사 등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의대에 입학했다. 그는 편지에서 “전쟁터에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며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대 진학을 생각하게 됐고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주변 사람을 돕고 싶었다”고 했다.

기부자는 의대 졸업 후 오사카 대학병원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5년간 근무하다 삿포로대 의대로 자리를 옮겨 학자로 살았다. “연구에 몰두하느라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세계적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3건의 논문을 싣는 등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는 “연구 결과로 얻은 특허권들을 제약회사 등에 팔아 재산을 모았다”고 했다.

기부자는 퇴직 후 호주에서 13년간 지내다 현재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삿포로의 20평 연립주택에 살고 있다. 그는 호주의 집을 판 돈 등을 기부했다. 그는 “젊은 시절 타국 생활을 혼자 헤쳐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귀화했지만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잊은 적은 없다”며 “일제와 전쟁 등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은 조국의 또래 노인들에게 조금이라고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공동모금회 관계자는 “기부자의 뜻을 받들어 저소득층 홀몸노인 식사 지원에 기부금을 사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재일교포 학자#공동모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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