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탄이 빗발치는 고지에서 공산군과 사투를 벌이던 국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6·25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한
임학수 씨(93)는 22일 “올해가 정전협정 60주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이같이 회고했다. 임 씨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휴전 때까지 동양통신과 연합신문, 동아일보 기자로 종군하며 전쟁의 참상과 실상을 취재 보도했다. 》
6·25전쟁 중 활동한 종군기자는 임 씨를 비롯해 국방부 정훈국에 등록된 한국기자 20여 명과 유엔군 소속 외신기자 20여 명 등 총 40여 명에 불과했다. 군 관계자는 “이들이야말로 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언론인”이라고 말했다. 임 씨는 당시 소령 계급장을 단 군복 차림에 취재 완장을 차고 아군을 따라 북진과 남하를 거듭하며 백마고지와 저격능선 전투 등 주요 격전지를 두루 취재했다. 그 공로로 휴전 이후 정부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는 “많은 종군기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지(死地)를 누볐다”며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특히 전투현장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취재해야 하는 사진기자들의 희생이 컸다고 한다. 임 씨도 1951년 5월 ‘철의 삼각지대 전투’를 취재하고 복귀하다 어디선가 날아온 포탄이 바로 앞에서 터지는 바람에 타고 가던 지프차가 전복되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다.
그는 제대로 된 통신수단조차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전선(戰線)을 오가며 전쟁의 실상을 국민에게 더 빠르고 상세히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전황(戰況) 등 중요한 기사를 우리보다 외신에서 먼저 보도할 때면 참으로 속이 상했습니다. 전쟁통에도 ‘특종’을 먼저 발굴하기 위한 취재경쟁이 치열했죠.”
그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과 함께 평양을 거쳐 1950년 10월 말 압록강 인근에 도착했을 때의 벅찬 감격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국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을 보면서 모두 남북통일이 목전에 왔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곧 참전할 것’이라는 미군 정보당국자의 첩보가 얼마 뒤 현실로 나타나면서 그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눈물을 머금고 군과 함께 후퇴하면서 전쟁이 절대로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죠.”
국군 1사단 본진보다 먼저 동료기자들과 함께 평양에 들어가 텅 빈 북한군 지휘부 청사와 김일성광장을 가슴 졸이며 취재한 기억도 잊을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아군의 폭격을 받아 부서지고 파괴된 평양 시내의 전경이 눈에 아른거린다”고 회고했다.
그는 “종군기자로 전쟁을 가까이에서 취재하면서 그 잔인성과 비참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되뇌었다. “적이 점령한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수십, 수백 명의 국군이 목숨을 바쳤고, 하룻밤 새 고지 정상의 태극기가 인공기로, 인공기가 다시 태극기로 바뀌는 상황을 지척에서 목격했습니다.” 지금의 평화와 번영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임을 잊어선 안 된다고 임 씨는 강조했다.
그는 전면남침 직전까지 민족과 평화를 내세워 대남유화 공세를 펼쳤던 북한의 ‘외유내흉(外柔內凶)’ 전략이 지금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전 60년간 북한이 저지른 숱한 대남도발이 그 증거”라며 “전후세대가 북한의 실체를 직시하는 한편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망각하지 말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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