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에 관한 한 내게는 밤낮이 없습니다. 비 오고 바람 불 때도, 바람 안 불고 햇볕이 퍼 부을 때도 내게는 모두 시의 시간입니다.” 》
수록 시만 총 607편, 두께만 1000쪽이 넘는 신작 시집 ‘무제 시편’(창비)을 펴낸 고은 시인(80)은 18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불과 반 년 동안 이 많은 시를 쓸 수 있었던 동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2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1부 ‘무제 시편’과 2부 ‘부록 시편’으로 구성돼 있다.
1부에 수록된 시는 주로 길 위에서 쓰였다. 거미줄처럼 얽힌 베네치아의 운하에서, 황무지를 지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아프리카 희망봉에서, 노시인은 밤낮 없이 퍼붓는 ‘시의 유성우(流星雨)’를 온몸으로 맞았다.
“제 낯선 꿈은 늘 길 위에 있어요. 집에 있어도 늘 바다로 가지요. 산중 사찰에 달린 풍경(風磬)이나 목어(木魚)를 보세요. 물고기가 있을 까닭이 없는 모순된 장소에 있지요. 그 모순성이 한 편의 로드무비 같은 제 삶과 닮았습니다.”
1부의 수록시 539편 모두가 제목 없이 숫자만으로 구분됐다. “시에 어떤 명제(제목)를 설정해 시를 거기에 흡수시키는 게 옳은가 하는 의문을 오래전부터 품었어요. 시를 쓸 때 시의 노예가 아니라 시에서 해방되고픈 마음도 있었지요. 내 시가 어떤 명제나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말고 제 운명을 개척하라고 그리하였습니다.”
신작 시 두 편을 연속으로 낭독하다가 어느새 시인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변변치 못한 시를 가지고 나오는 게 부끄러워” 소주를 두어 병 마셨노라고 했다. 노시인의 수줍은 미소가 아기 같았다. 시인도 시집 서문에 스스로를 ‘시의 아기’라고 칭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여태껏 시를 쓰고 있으니까요. 시의 아기인 게 분명합니다.”
시인은 30년 가까이 살던 경기 안성시를 떠나 올해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2부 ‘부록 시편’에선 안성 시대를 마감한 소회와 근황이 많이 엿보인다. “광교산 자락은 참 여성적이라 내가 그 품에 안긴 느낌입니다. 다들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죽을 장소(광교산)야말로 고향이지 싶어요. 실은 지구도 태양계도 아닌 안드로메다 어디쯤, 아니 우주 도처가 내 고향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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