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사선(死線)을 넘었던 ‘불사조’ ‘베트남전쟁의 한국 영웅’이 마지막 사선은 끝내 넘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예비역 중장(사진)이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7세.
고인은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다가 1947년 월남했다. 모태신앙인이었던 그에게 공산주의의 종교 탄압은 월남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월남한 뒤 그는 1948년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24세에 중대장으로 참전해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당시 김일성의 오른팔이었던 길원팔 노동당 제2비서를 생포한 얘기는 유명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남다르다. 그는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백골병단’을 만들어 참전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생존자들과 강릉에 갔을 때 당시 제9사단장 참모장이었던 박정희 대령을 처음 만났다. 그는 “박 대령은 목숨을 걸고 게릴라전을 한 것이 대단하다며 우리를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피 묻은 내 점퍼를 자신의 털 달린 좋은 점퍼와 바꿔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런 인연은 5·16까지 이어졌다. 제5사단장이었던 그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까지 진출해 쿠데타를 지원했다. 이후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맡으며 박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채 장군은 1965년 육군작전참모부장 시절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에 임명돼 3년 8개월간 월남파병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국군의 월남 파병에 대해선 애초에 반대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조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선 파병이 불가피하다고 태도를 바꿨다. 베트남전에서 미군 지휘를 받지 않고 국군의 독자적 지휘권을 관철시킨 그의 강단은 전설로 남아 있다.
채 장군은 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고 1969년 이세호 장군에게 사령관직을 물려준 뒤 귀국했다. 그는 군인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지만 1972년 대장 진급이 좌절되자 중장인 제2군사령관으로 전역했다. 박 전 대통령의 유신 집권을 반대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채 장군은 언론 인터뷰에서 “1972년 초 대구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만났다”며 “여러 차례 ‘각하가 스스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 ‘장기집권은 각하를 죽이는 길이다’라고 말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고 떠올렸다. 1972년 전역 후에는 스웨덴대사, 그리스대사, 브라질대사를 역임했고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과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고인은 군 복무기간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1회), 충무무공훈장(3회), 화랑무공훈장(1회), 을지무공훈장(2회) 등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정인 씨와 1남 2녀가 있다. 장례는 육군장으로 진행되며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28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3010-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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