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를 생각하면 아직도 앞이 캄캄합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1일 03시 00분


52년 詩歷 이근배 시인, 9년만에 ‘추사를 훔치다’ 펴내

이근배 시인(74·사진)은 스스로를 연벽묵치(硯癖墨痴·벼루 먹 수집에 미친 사람)라 칭한다. 실제로 그는 지난 40여 년간 명품 벼루 1000여 점을 모은 수집가다.

그는 그 묵향 속에 깃든 여유와 기품, 전통적 가치에 주목해 왔다. 시인이 9년 만에 낸 시집 ‘추사를 훔치다’(문학수첩)에는 옛 시절의 전통과 아름다움이 담겼다.

10일 간담회에서 시인은 ‘젊어서 쓴 글을 두 번이나 불태웠다’는 추사의 말로 입을 열었다. 52년 시력(詩歷)으로 ‘시단의 터줏대감’이라 불리는 그는 ‘독필’이라는 시에서 ‘열 개의 벼루를 갈아 바닥을 내고 천 개의 붓을 닳도록 썼어도 편지 글씨 하나도 못 익혔다’는 추사의 편지글을 곱씹는다.

“추사는 천 개의 붓을 다 쓰고도 글씨가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떻게 붓을 잡으랴 했습니다. 어린 시절 동아일보에서 본 소설가 최정희의 새해 소망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3년이 지나도 후회하지 않는 작품을 쓰고 싶다.’ 여전히 시를 생각하면 앞이 캄캄합니다.”

계속 시를 쓰라고 그를 재촉하는 것은 조상의 혼이 깃든 글씨와 그림, 청자, 백자들이다. 그는 “예술품들에 배어 있는 정신, 그 ‘귀신’에 홀려서 거기서 시를 뽑아 쓴다”고 했다. “예전에 김춘수 선생이 그랬습니다. ‘우리나라에 좋은 시는 있지만 위대한 시는 없다.’ 위대한 시가 뭘까. 나는 한국이라는 커다란 모티브를 품은 시, 한국의 시가 위대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시의 ‘앙꼬(팥소)’로 나를 집어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는 감성이 아니라 체험이기 때문에 남을 집어넣으면 맛이 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나이든 시인들끼리 모이면 ‘요즘 시가 다 왜 이러냐’고 그럽니다. 간첩 난수표 같이 어려운 소리, 모르는 소리, 시에 쓰면 안 됩니다. 시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것이니까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이근배#추사를 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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