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혜(왼쪽) 지영 씨 자매는 어머니를 유방암으로 떠나보내고 자신들도 같은 진단을 받았지만 긍정에너지로 암을 이겨냈다. 지난해 항암치료를 마치고 백두산에 오르는 모습. 이대목동병원 제공
“우당탕탕….”
아버지는 미친 사람처럼 집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2012년 두 딸이 유방암 확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30분가량이 지났을까. 장롱 한구석에서 빛바랜 서류 봉투가 나왔다. 2004년 유방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두 딸 앞으로 들어둔 암 보험 증서였다. 생을 정리하며 가족 몰래 남긴 마지막 선물을 8년 만에 발견한 순간이었다. “엄마∼. 우린 이제 울지 않을게. 우리 둘이 똘똘 뭉쳐서 끝까지 이겨낼게.” 성지혜(31), 지영 씨(29) 자매의 희망찬 유방암 투병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자매는 2004년 이후 줄곧 미국에서 지냈다.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 출발을 할 수 있게 딸들을 배려했다. 자매는 홀로 서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최대한 바쁘게 지냈다. 몸에 이상을 느낀 건 직장을 잡고 자립 기반을 어느 정도 마련한 2012년 즈음. 지혜 씨는 “이제 좀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가슴에서 딱딱한 몽우리가 만져졌다. 8년 전의 슬픔과 절망이 한순간에 다시 찾아오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언니는 2012년 9월 급하게 한국에 들어와 이대목동병원을 방문했다. 10월 먼저 가슴에서 15cm가량의 암 덩어리를 떼어냈다. 11월엔 1cm 미만의 암 덩어리 2개를 더 제거했다. 또 3개월마다 암 세포만 찾아 없애는 표적치료를 해야 했다. 언니가 수술을 받을 즈음 동생도 비슷한 증세로 귀국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동생은 유방암 초기였다.
어머니를 유방암으로 떠나보내고 자신들마저 같은 암에 걸렸을 때의 절망스러움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매는 여느 암 환자와는 달랐다. 병원에선 ‘긍정 시스터스’로 불렸다. 이들 때문에 암 병동 전체 분위기가 달라질 정도였다.
자매가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하루 종일 토할 때는 임종을 앞두기 전까지 병명조차 알리지 않았던 어머니의 강인함을 떠올렸다. 지영 씨는 “어머니는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왜 아픈지도 알려주지 않았다”면서 “임종 즈음 안마를 하면 온몸에서 암 덩어리가 손에 느껴졌는데, 그때쯤 암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자매는 암 병동의 상담사 역할도 했다.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이 늘면서 얼굴만 보면 초기인지 중기인지 말기인지가 보였다고 한다. 40대 이상 중년이 대부분인 유방암 환자들은 “시간이 흘러 우리 딸도 암에 걸리면 어떡하지? 나를 원망하겠지?”라며 고민을 자매에게 털어놓곤 했다. 자매는 “우리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밝게 지내지 않느냐”며 다독였다.
지난해 자매는 항암치료를 마치고 경기 남양주의 한 마을에서 요양생활을 시작했다. 청정한 환경과 병원 접근성을 모두 갖춘 곳에서 요양했던 어머니처럼. 좋은 공기를 마시고 좋은 음식을 먹고 긍정적으로 생활한 덕에 현재까지 재발없이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이대목동병원이 마련한 퇴원 환자 프로그램을 통해 백두산 천지에도 올랐다.
지혜 씨는 “이제는 조심스럽게 아이도 낳고 조카들도 보며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암 극복은 긍정적인 마음에 달려 있다는 걸 많은 사람이 알게 됐으면 좋겠다”며 밝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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