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4일 03시 00분


대영박물관에 한국관 만든 ‘탕카’ 전문가

고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 동아일보DB
고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 동아일보DB
영국 대영박물관에 한국관이 조성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고인은 자수성가한 기업가의 전형이었다. 1923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1945년 광복 때 혈혈단신으로 한국에 왔다. 화공약품 점원으로 출발해 1968년 작물보호제 제조업체인 한국삼공을 세웠으며, 1972년에는 독일 제약회사 베링거인겔하임의 한국 합자회사인 한국베링거인겔하임을 설립했다.

한 이사장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다. 한 독일 사업가가 겸재 정선의 그림을 사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유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인은 거의 매달 외국 출장을 가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중국 베이징 등 세계 곳곳에서 부지런히 문화재를 수집했다.

1988년 일본 고대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의 영향을 받아 티베트 불화인 ‘탕카’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고인의 컬렉터 인생에 큰 전기가 됐다. 이후 세계적인 탕카 수집가로 이름을 알리며 9000점에 이르는 탕카 작품을 모았다.

티베트 미술품은 정치적인 이유로 다수가 티베트에서 반출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어 이를 한데 모은 한 이사장의 컬렉션은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받는다. 대영박물관도 이런 고인의 노력을 높이 사 2003년 박물관 개관 250주년 기념 특별전으로 ‘티베트의 유산-한광호 컬렉션의 회화’를 개최했다.

고인이 40년 넘게 열정을 바쳤던 한빛문화재단의 소장품은 탕카와 국내외 미술품을 비롯해 2만 점이 넘는다. 중국 미술품에도 조예가 깊어 도자기와 금속공예 회화를 아우르는 여러 미술품을 모았다. 1999년 개관해 2006년 서울 종로구 평창동으로 옮겨간 화정박물관에서 고인의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다. ‘탕카를 배우려면 화정박물관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국 연구가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997년 고인은 대영박물관에 100만 파운드(당시 약 16억 원)를 기부해 주목받기도 했다. 외국 박물관을 자주 찾던 그가 중국관이나 일본관에 비해 초라하거나 아예 존재조차 없는 한국관을 보고 안타까워하다 기부하게 된 것이다. 박물관은 고인이 기부한 돈으로 ‘조선백자 달항아리’를 비롯한 여러 한국 문화재를 구입했고, 이는 한국관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에 1999년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은 한 이사장에게 ‘영국명예시민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대영박물관 입구 기증자 명단에는 고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유족은 부인 박하순 한빛문화재단 이사장(79)과 한태원 한국삼공 사장을 비롯해 1남 3녀. 삼성서울병원, 발인 25일 오전 8시. 02-3410-6917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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