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Hot 피플]에르도안 터키 총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일 03시 00분


터키 구한 ‘술탄’인가, 독재 꿈꾸는 ‘사탄’인가

“돈을 다 숨겼느냐?”(에르도안 터키 총리)

“아직 3000만 유로가 남았습니다.”(차남 빌랄 에르도안)

무려 10억 달러(약 1조680억 원)에 이르는 자산 은폐 방안을 아들과 논의한 녹음 파일이 폭로되는 바람에 집권 후 최대 위기를 맞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60·사진). 11년간 집권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한때 ‘21세기의 술탄’으로 불렸지만 각종 비리 스캔들, 무리한 4연임 시도,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실각 위기를 맞고 있다.

1954년 이스탄불 교외 카심파사에서 출생한 에르도안 총리는 길거리에서 사탕 및 생수 등을 팔며 학교를 졸업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1994∼1998년 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 시장을 지냈고 2001년 정의개발당을 창당했다. 2003년 총선 승리로 59대 터키 총리가 됐고 2007년, 2011년 총선에서 잇따라 승리해 최초의 3선 총리가 됐다. 3선의 최대 요인은 경제 성장. 취임 당시 3030억 달러였던 터키의 국내총생산(GDP)을 2012년 8172억 달러로 늘렸고 유럽연합(EU) 가입 협상도 시작했다. 이슬람과 시장경제를 잘 융합시켰다는 평가에 터키의 국부 겸 초대 대통령인 케말 파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자신감을 얻은 그는 여성 히잡 착용,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 및 주류 판매 규제 등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때부터 서구 문물에 익숙해진 국민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1923년 건국 당시 케말 파샤가 정교분리를 선언한 뒤 터키가 세속주의 노선을 걸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예고된 갈등이었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중순에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도 그가 재개발이 예정된 이스탄불 게지 공원에 오스만튀르크 당시의 포병부대 및 이슬람 사원을 짓겠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이에 반발하는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사태는 악화됐다. 독실한 수니파 이슬람 신자인 그는 1999년 “이슬람 사원은 우리의 병영이며 신도는 우리의 병사”라는 시를 집회에서 암송해 국민 선동 혐의로 4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총리의 집권 연장 시도에 비판도 많다. 당규상 총리 4연임이 불가능하자 올해 8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그는 최근 지지율 하락으로 당선이 불투명해지자 당규를 고쳐 다시 총리가 되려고 시도했다. 지난달 6일에는 정부가 인터넷 콘텐츠의 유해성을 자의적으로 판단한 뒤 접속을 차단하는 인터넷 통제 강화법을 밀어붙여 독재 논란을 확산시켰다.

비리 연루설도 끊이지 않는다. 이번 비자금 스캔들뿐만 아니라 지난해 12월 터키 검찰은 부동산 비리 혐의로 에르도안 내각의 장관 3명을 포함한 그의 최측근 24명을 구속했다. 에르도안 총리는 “녹음 파일과 비리설은 완전한 날조”라며 그 배후로 이슬람 사상가 출신의 정적(政敵) 페툴라 귤렌을 지목했다. 하지만 귤렌은 15년째 미국 망명 중이어서 이런 주장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많다.

에르도안 총리의 다음 시험대는 이달 30일에 치러질 지방선거. 세속주의를 원하는 대도시 주민 및 엘리트와 달리 농민과 저소득계층은 아직 그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정정불안이 계속되면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케말 파샤의 적자를 자임하는 군부가 개입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래저래 그의 앞날은 풍전등화인 셈이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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