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와 문학을 소개하는 영어책 ‘나의 한국: 갓없이 40년’을 펴낸 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 영문 이름은 ‘Kevin O'Rourke’이지만 조병화 시인이 지어준 오록(吳鹿)이라는 한자 이름도 갖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갓은 선비의 상징이죠. 외국인이 드물었던 196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저 같은 ‘코 큰 놈’은 국문학을 해도 인정받기 쉽지 않았어요. 신라의 최치원도 당나라에서 과거급제하고도 중국 사람이 아니라서 출세에 한계가 있었잖아요. 한국에서 선비로 인정받고 싶었던 아일랜드 코쟁이의 처지를 농담처럼 빗댔죠.”
13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자택에서 만난 케빈 오록 경희대 명예교수(국문학·75)는 최근 영어로 펴낸 저서 ‘나의 한국: 갓 없이 40년(My Korea: 40 years without a horsehair hat·르네상스북스)의 제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아주 유창한 한국말로.
이 책엔 아일랜드 신부(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로 1964년 선교차 찾아왔다가 한국의 문학작품에 ‘꽂혀’ 국내 1호 외국인 국문학 박사(연세대·1982년)가 된 그의 40년 한국문학 체험담이 담겨 있다.
그가 영어로 옮긴 작품 목록을 한 번이라도 훑어본다면 갓은 물론이고 사모(紗帽·조선시대 관리가 집무 때 쓴 모자)까지 씌워줘도 부족하다. 최인훈의 ‘광장’,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같은 소설과 서정주·조병화 시선집, 시조선집, ‘김삿갓 시선집’까지 그의 손을 거쳐 번역 출간된 책만 20여 권. 시조는 영역한 작품이 1000수가 넘는다. 명함에 적힌 우리말 이름 ‘오록(吳鹿)’은 조병화 시인이 지어줬다.
“저는 한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 이규보(1168∼1241)라고 생각합니다. ‘영정중월(詠井中月·우물 속의 달을 노래함) 같은 한시에 담긴 상상력의 규모와 욕심을 초월한 인생관을 보세요. 중국의 이태백이나 소동파와 견줘도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그가 책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안타까움을 표한 미당 서정주는 현대시인 중 으뜸으로 꼽는 인물이다.
“안타깝게도 친일이나 군사정권 찬양 같은 실수를 했죠. 하지만 미당은 읽는 이에게 천상의 빛을 본 것 같은 깨달음(禪)’의 순간을 선사하는 시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2012년부터 한국문학번역원 이사를 맡아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일을 돕고 있는 그는 우리 문단과 문화계를 향한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매년 노벨 문학상 발표 때면 나라 전체가 들썩이잖아요? 자문해 볼 필요가 있어요. 문학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나라 밖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난해한 시는 늘어나는데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깨달음을 담은 시가 줄고 있는 것도 걱정스럽습니다.”
한국 땅을 밟은 지 올해로 꼭 50년.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지만 한국문학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서 만큼은 나이를 잊었다. “싱가포르에서 한시와 시조, 가사 600여 수를 번역한 조선시대 시선집이 나올 예정입니다. 요즘도 자꾸 서거정이나 김시습, 혜심 스님 같은 옛 시인의 작품에 눈길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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